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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모반자, 예수는 살아 있다[예수의 마지막 일주일-7강 : 부활절 아침]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 신앙도 없고, 그분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승되지 않았을 것이다. 잔인한 세기에 로마제국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부활 이야기는 “하느님이 예수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럼 예수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독실한 신자라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여러 증언들은 세부내용이 서로 엇갈리고 있으니, 생각해 볼 구석이 많다.

루카복음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머물면서 부활한 예수를 경험했다고 전하고,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은 제자들이 갈릴래아로 돌아가 거기서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전한다. 예수부활의 실마리가 된 것은 ‘빈무덤’이며, 그분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모습이었다고 전하는 기사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라는 구절을 근거로 하는 예수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이 믿음의 당락을 결정한다는 것은 그 사건을 이해하는 데 때로 방해가 되며, 끊임없는 질문을 낳는다. 그래서 <마지막 일주일>으 저자들은 축자적 의미의 사실성을 일단 접어두고, 예수 부활 이야기에서 ‘비유로서의 의미’를 먼저 찾으려 시도했다.

Annibale Carracci – Resurrezione di Cristo – 1593

마르코복음, 부활 이야기

예수 부활 ‘이야기’를 다룬 최초의 문헌은 <마르코복음>이다. 마르코는 간단히 8절에 걸쳐 부활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마태오복음에서 20절, 루카복음에서 53절, 요한복음에서 56절인 것에 비해 비교적 간략하다. 그리고 여기서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난 사건은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는 다른 복음에만 나온다.

학자들에 따르면, 마르코 복음은 16장 8절에서 갑자기 끝난다. 안식일 끝난 주간 첫날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무덤에 찾아갔으나 빈무덤 뿐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젊은이(천사)가 그들에게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준다.(6절) 그리고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7절)이라고 전하라 이른다. 그러나 여인들은 너무 두려워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8절)

이 갑작스런 결말을 아쉬워한 이들이 2세기 초에 비교적 긴 결말을 덧붙였다.(16장 9-20절) 부활한 예수가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이어 다른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승천하셨다는 이야기가 마치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발현 이야기의 요약본처럼 덧붙여진다.

‘갈릴래아로 가라’는 이야기가 루카복음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단지 이 말로 대체된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6-7)

마르코 복음은 부활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죽은 자의 땅에서 발견할 없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는 “처음 복음이 시작된 곳으로 가라”는 명령으로 이어진다. 그 땅에서 예수처럼 살기 시작함으로써 그분의 현존(부활)을 보증하라는 전갈이다.

마태복음의 예수 부활 이야기

마태오복음에서는 두 번에 걸쳐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마리아 막달레나 등 여인들이 아침에 무덤에 찾아갔다가 천사로부터 “갈릴래아로 가라”는 말을 듣고 돌아서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예수를 만난다. 예수는 “평안하냐?”고 안부를 묻고 갈릴래아로 가라고 천사가 했던 말을 되풀이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28,10)

두 번째는 갈릴래아로 돌아간 제자들을 ‘산’에서 만나 복음선포의 사명을 부여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8,18-20)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제 하늘과 땅의 주인이 황제가 아니라 예수’라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실행’(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처럼, 예수는 여전히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을 ‘임마누엘’이라는 점이다.

루카복음의 예수 부활 이야기

루카복음에서 제자들은 갈릴래아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오순절에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예수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또 예루살렘에서 열 한 제자와 동료 제자들 사이에 나타난다. 엠마오 이야기는 부활 이야기들이 비유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여기서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과 동행하시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 앞에서 빵 나눔을 통해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신다. 그중 하나는 클레오파스이며, 나머지 제자는 누군지 모른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와 더불어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 이야기에서는, 특별히 부활한 예수의 ‘육체성’에 주목한다. 예수는 유령이라 여기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24, 39)고 하면서, 손과 발의 상처를 보여주고, 구운 생선도 한 마리 먹는다. 그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의 회개와 용서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시고, 베타니아 근처에서 승천한다. 사도행전에서는 부활한 지 40일 후에 승천한다.(사도 1,3)

Caravaggio - L'incredulità di San Tommaso

요한복음의 예수 부활 이야기

요한복음의 예수 부활 이야기는 드라마틱하다. 처음 예수의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였으며, 베드로와 요한이 이 소식을 듣고 빈 무덤에 와서 확인한 뒤에도 마리아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혼자 무덤가에 있었다. 예수가 나타났을 때도 마리아는 ‘정원지기’인줄로만 알았다. 마리아가 스승을 알아본 것은 “마리아야!”(20,16) 하고 예수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준 순간이었다.

그날 저녁에 다른 제자들에게도 나타난 예수는 여드레 뒤에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 토마스에게도 상처를 보여준다. 토마스는 다른 사람들의 간접증언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직접 부활한 예수를 경험하고자 원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본래 20장 31절에서 끝났을 것인데, 나중에 승천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예수는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숯불에 빵과 물고기를 구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며 다정한 말씀을 건네신다. 그 후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예수의 길은 사랑의 길이고, 그 사랑이 가득한 나라가 ‘하느님 나라’다. 이 장면에서 예수는 한번은 베드로에게, 한 번은 요한에게, 두 번에 걸쳐 “나를 따라라”(21,19.22)고 당부한다. 이 말은 예수의 마지막 발언이었다. 결국 예수가 이승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한 결정적인 말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압바는 사랑이시고, 나도 사랑이다. 너도 사랑하라. 이게 제자된 자가 따라야 할 길이다.”

예수 부활 이야기의 의미

복음서의 예수 부활 이야기는 두 가지 메시지에 집중한다.

첫째는 “예수는 살아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죽음 이후에도 제자들에게 계속 경험된다. 예수의 제자가 아닌 다른 군중들에게 부활한 예수가 나타나지 않은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는 살과 피를 지닌 형상이나 생전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자들은 단박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보는 순간은 생전의 그분 모습을 상기시키는 어떤 행위를 통해서였다.

빈 무덤 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예수는 더 이상 죽은 자들 가운데 있지 않고, 산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다는 사실 역시 거듭 확인된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 밖에서 예수의 부활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가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신 것은 예수에게 적대적이었던 예루살렘’이 아니라 예수의 삶이 있었던 ‘갈릴래아’에서야 그분을 복기(復碁)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복음은 시작은 다시 그곳에서 민중 속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이르는 것이다.

둘째는, “하느님께서 예수를 의롭다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분을 처형한 성전세력과 황제권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예수의 부활은 예수에 대한 긍정과 정치-종교권력에 대한 부정을 드러내는 일이다. 루카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제국의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며,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는 이 세상 모든 권세를 능가하는 권위를 부여받았다. 한편 부활절 이후 “예수는 주님시다”라는 고백은 이 세상의 지배체제는 하느님께 속하지 않으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이게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제국에서 박해받은 원인이기도 하다.

바오로 사도와 예수의 부활

마르코에 앞서 예수의 부활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바오로 사도이다. 바오로는 50년대에 코린토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첫 번째 편지에서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뵙지 못하였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바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나의 업적이 아닙니까?”(1코린 9,1)라고 말한다. 이는 곧 자신이 자유인이며, 사도이며,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를 경험했는데, 예수 부활 이후 최소 몇 년은 지나서였다. 그는 큰 빛을 보았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 라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는 주변의 다른 사람은 경험하지 못한 일이며, 바오로의 개인적이고 은밀한 경험이라는 점에서 ‘부활한 예수에 대한 환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바오로는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이야기도 ‘환상’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자신의 경험이나 제자들의 경험을 모두 똑같이 그분이 “나타났다”고 표현한다.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5-8)

‘환상’은 비현실적인 정신장애인 ‘환각’과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실제적인 ‘목격’만큼이나 실체를 갖고 있다. 종종 꿈의 영역이 그러하듯이, 환상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 그래서 환상은 누군가의 삶을 뒤바꾸는 전환점을 마련하기도 한다. 성인들이 경험했던 환상은 사실상 그들에게 현실보다 더 생생했다. 광적으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울이 이런 경험을 통해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바오로가 되었다. 그 결과 바오로는 로마황제가 아닌 예수를 주님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오로에게는 더 이상 예수가 참혹하게 십자가 처형을 받은 갈릴래아의 목수가 아니라 ‘영광의 주’로 여겨졌다. 이는 곧 황제권력의 폐위였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피 2,6-11)

The Low Edge of the Storm by Catherine Hyde Via

부활의 삶, 개인의 변화와 정치적 변혁

예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네 삶이 고난 가운데 있으며, 늘 채워지지 않는 영적 허기에 시달리며, 인간과 세상의 온전한 해방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은 우리 삶의 결말이 ‘죽음’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이 아니라, ‘부활’이 상징하는 모든 것이라 믿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이것은 다음 생애를 기약하는 ‘윤회’와 다른 개념이며, ‘지금여기’에서 거듭 새삼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깝게, 예수부활의 의미를 따지자면, 하느님께서 빌라도(세상권력)가 내린 ‘원심’을 파기하고, 예수를 복권시켰다는 뜻이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권력자에게 속하며 이기심과 불의가 판치면서 종말론적 혁명이 없는 절망적인 공간이 된다. 따라서 부활‘신앙’은 개인적 변화와 정치적인 변혁을 요구한다.

전통적인 신학에서도 죽음과 부활은 ‘갱신’을 위한 짝말이다. 마치 세례가 묵은 과거의 자기를 죽이고 새로운 참자기로 거듭나는 예식인 것처럼. 기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죽음과 부활의 길이다. 예수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이라 했다. 루카복음은 여기에 “날마다”(루카 9,23)라는 말을 덧붙였다.

바오로 사도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때도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죽음과 십자가를 통해 얻은 ‘새로운 길’에 참여하는 변화된 삶을 이르는 말이다. 심지어 요한복음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고 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 부활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부활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회심만 강조할 때, 자칫 예수가 기꺼이 목숨을 바친 열정의 의미가 왜곡될 수도 있다. 예수에게 그 열정의 향방은 하느님 나라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열정이 지배체제와 대결하는 장소이며 처형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예수를 이끌었다. 그러므로 부활절의 정치적 의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하느님의 정의’와 상관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단순한 교통사고처럼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살해당했다. 십자가는 노예들과 정치범들의 처형도구였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역적’으로 죽었지만, 그분이 ‘의인’임을 하느님께서 예수를 일으켜 세움으로써 입증해 주셨다.

<마지막 일주일>에서는 바바라 에렌라이히가 <빈곤의 경제>(2001)이라는 책에서 어느 부흥회 설교자를 비판한 논평을 인용하고 있다. 그 설교자는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어야 천국에 간다고 말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슬픈 눈을 가진 이 군중들에게 수입의 불공평과 최저임금 인상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주석을 곁들여 ‘산상설교’를 읽어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여기서 단지 시체로 나타난다. 살아있는 사람, 술 취한 노숙자, 조숙한 사회주의자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으며, 예수가 말했을 법한 어떤 것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진짜 하는 일은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또 못 박아 그가 결코 한 마디도 말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일주일>의 저자들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부활절 이후의 신학이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반제국주의 신학이며,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열정은 연민과 정의와 비폭력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정의는 연민의 사회적 표현이다. 사랑은 정의의 영혼이고, 정의는 사랑의 몸이다. 이게 바로 부활절의 주제이다. 예수의 마지막 주간은 이 세상의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이다. 그 주간이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통과해 부활로 가는 여행에 동참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 여행에서 다시금 우리는 성지주일에 묵상했던 예수의 소박한 행렬과 빌라도의 의기양한 행진 사이에서 어느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지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반제국적 복음의 길은 개인적 변화의 길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변혁의 길이다.

Palm Sunday | Kristin Miller Liturgical/Ecclesiastical Illustrations

부활신앙의 확증

예수의 부활이 은유이든 사실이든 중요한 것은 예수를 따르다가 한때 배신했던 제자들이 숨어있던 다락방에서 나와 복음을 선포하고,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소유를 나누었으며, 마치 승리한 것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이다. 불명예스러웟던 베드로는 이 새로운 운동의 심장이자 영혼이 되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68년 로마에서 예수처럼 처형당했다. 야고보 사도는 46년 헤롯데 아그립파에게 처형되었고, 예수의 형제로 알려진 야고보는 63년 대사제 안나스의 아들 아나누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예수의 적대자였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36년경 헤로데 아그립파에게 밀려나 권력을 잃었으며, 빌라도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죽임을 전후해 37년경 사마리아 종교분쟁 이후 실각되어 로마로 송환되어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사제 가야파 역시 36년에 해임되었고, 대사제직을 이어받은 안나스의 아들 요나단은 60년에 시카리에게 암살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열정적인 초기 박해시대를 거치고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등장하면서 처음으로 실제 권력을 갖게 되었고, 예수의 복음은 ‘제국의 종교’가 된 그리스도교 안에서 퇴색되었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로마군인들에게 조롱거리였던 자주 옷을 입히고 왕관을 씌우고, 처형도구인 십자가를 장신구로 만들어 달았다. 이를 두고 <가장 길었던 한 주>에서 닉 페이지는 “우리는 그분을 얻고 역사를 잃었다”고 적었다.

비폭력과 무력함과 가난함에 관한 모든 것들이 길을 잃었지만, 교회 안에서 아웃사이더들이 나타나 예수의 복음을 계승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제국 안에서 사막으로, 감옥으로 가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가 남긴 복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석하는 막대한 신학서적으로 뒤덮였지만, “그분은 우리가 산처럼 쌓아둔 이론들을 거침없이 침몰시키신다.”

“역사적 예수는 압제하는 종교와 정치제도에 도전하셨고, 가장 가난한 이들의 불행에 열렬히 공감하셨으며, 문자 그대로 우상 추방자가 되었고, 제도권을 조롱하시고 그들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셨으며, 사랑의 길을 걸어 결국 승리를 쟁취하셨다. 그분은 여전히 살아 계시다. 자주 옷을 벗어버리고 보좌에서 내려와 궁핍한 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신다. 그분은 살아 계셔서 여전히 저항하신다. 위대한 모반자이며 전복된 나라의 지도자 예수 그리스도, 요셉의 아들 예슈아, 하느님의 아들이시다.”(가장 길었던 한 주>, 닉 페이지, 포이에마, 393쪽)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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