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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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납시다”
  • 교종 프란치스코
  • 승인 2017.04.0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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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카르피 제5주일 미사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4월2일 5년 전 대지진 피해를 딛고 복구된 이탈리아 북부 카르피와 미란돌라 지역 사목방문 중 카르피 광장에 운집한 7만여 신자들과 함께 사순 제5주일 미사를 봉헌했다.]
 
  교형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특히 당신의 친구인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파스카 전에 완수하신 경이로운 여러 표징들 중 마지막 표징에 관해 살펴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무덤은 큰 돌로 닫혀 있고 그 주변에는 단지 눈물과 비통함만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커다란 슬픔으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요한 11,33)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35절) 그러고는 무덤으로 향하셨는데, 복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38절)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악에서 멀리 계시지만 고통 받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마술처럼 악을 사라지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겪으시고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어 고통을 사시면서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라자로의 죽음을 위한 일반적인 슬픔 한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낙담에 빠지지 않으신다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비록 친히 고통을 겪으시지만 확고하게 믿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울음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북받친 상태에서 무덤을 향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분을 에워싸고 있는 감정으로 굴복한 분위기에 사로잡히지 않으시고 신뢰를 가지고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41절) 

이와 같이 고통의 신비 안에서는 유리창에 붙어 있는 파리처럼 생각과 발전이 고통 앞에 파괴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즉, 현세의 삶에 속하는 고통을 피하지 말고 비관주의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무덤가에는 이 같은 만남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한편에는 큰 실망 죽음에 대한 고뇌를 거쳐 종종 패배와 극복할 수 없는 내적 어둠을 경험하는 우리의 죽을 인생의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생명을 위해 창조된 우리 영혼은 영원한 선에 대한 갈증이 어둡고 오래된 악에 의해 억압되었음을 느끼면서 고통스러워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무덤의 패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죽음과 악을 이기고 하나의 이름을 가진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희망이라고 이름 지어 부르십니다. 그분께서는 약간의 행복을 가져다주시거나 생명연장을 위한 어떤 구제책을 가져다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다.”(25절) 그래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돌을 치워라.”(39절) 그리고 라자로에게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절)

사진출처=on.fb.me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또한 어느 편에 서야 할지 결정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무덤 편에 서거나 또는 예수님 편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슬픔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희망을 향해 열어젖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전히 삶의 폐허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분처럼, 하느님의 도움을 통해 폐허를 일으켜 세우고 인내심을 가지고 희망을 재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생의 “왜”라는 큰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곧, 어제와 오늘의 무덤을 의기소침하게 바라보거나 또는 우리의 무덤가에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미 작은 무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 안에 어떤 부분이 약간 죽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상처, 어쩔 수 없이 겪었거나 혹은 잘못 저지르게 된 과실, 중단 없는 원한과 돌아오고 또 되돌아오는 후회, 극복할 수 없는 죄들 말입니다.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이 작은 무덤을 규명해봅시다. 바로 거기서 예수님께 기도합시다.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초대하기 보다는 오히려 종종 우리 안에 있는 캄캄한 동굴 속에 혼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고 말씀하시는 그분께 가는 대신 근심 속에 빠지고 뒤죽박죽되면서 아픈 상처를 핥으면서 항상 우리 자신을 찾는 유혹에 빠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짐을 어깨에 메고 한탄하며 낙담한 채 혼자 머물려는 유혹에 갇히지 맙시다. 두려움에 대한 쓸데없고 결론 나지 않는 논리를 믿지 말고 어쩌다 한 번이 아닌 완전히 악으로만 치닫게 되는 체념을 되풀이하지 맙시다. 이것이 무덤의 환경입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열어 주고자 하십니다. 그 길은 곧 그분과 만남의 길, 그분께 대한 신뢰의 길, 마음의 부활의 길이요, “일어나라! 일어나라! 바깥으로 나와라!”하고 말씀하시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이제 라자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각자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껴봅시다. “바깥으로 나와라!” 희망 없이 꽉 막혀 있는 슬픔에서 바깥으로 나오십시오. 여정을 방해하는 공포의 띠를 푸십시오. 당신을 가로막는 불안과 약함의 올가미를 풀고 하느님께서 매듭을 풀어 주신다고 되풀이 하십시오. 예수님을 따르면서 헝클어지는 문제들 주변에 우리의 인생이 얽혀 들지 않는 방법을 배웁시다. 

항상 문제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항상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할 때 또 다른 문제가 어김없이 도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안전성을 찾을 수 있고 이 안정성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안정성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라고 부릅니다. 즉 그분과 함께 기쁨이 마음에 깃들고 희망이 다시 태동하며 고통이 평화로 변형되고 두려움이 신뢰로 변하고 시련이 사랑의 봉헌으로 변합니다. 

또한 비록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가 덜해지지 않더라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당신의 손이 가까이 있을 것이고 우리 모두에게 우리 각자에게 용기를 주시며 말씀하시는 당신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바깥으로 나와라! 나에게 오너라!”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에게도 지금처럼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돌을 치워라!” 과거가 얼마나 무겁든지 죄가 얼마나 크든지 수치가 얼마나 강하든지 주님께 다가서는 입구를 결코 차단하지 맙시다. 그분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그 돌을 그분 앞에서 치워버립시다. 지금이 우리의 죄, 세속적인 허영에 대한 우리의 집착, 영혼을 가로막는 교만, 우리 사이의 반목, 가족 안에서의 불화 등을 제거하기 위한 적절한 시기입니다. 이 순간이 이 모든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기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시어 해방시켜 주셨기에 우리는 주님을 목말라 하는 이 세상에서 생명의 증거자들이 되도록 슬픔에 짓눌리고 혹사당한 마음들 안에 하느님의 희망을 북돋우고 회생시켜주는 증거자들이 되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의 선포는 오늘도 에제키엘서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살아 계신 주님의 기쁨입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에제 37,12)
 
교종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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