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자비행을 설교한 순교자, 요한 크리소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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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자비행을 설교한 순교자, 요한 크리소스토모
  • 한상봉
  • 승인 2017.03.27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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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John Chrysostom (347–407)

대답은 언제나 서쪽에 있었다.
내 언제고 동산에 앉아
지는 노을을 기쁨으로 맞이하기를,
그리하여
가난한 마음이
아름답게 눈물지어 행복하기를,
갈망하였다.
다 내어주고 빈손으로
그분에게 함몰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니까, 한 이십여 년 전이군요. 대학 졸업을 앞둔 후배가 찾아와 묻더군요. “선배님, 직업에도 복음적인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나요?” 뭔 뜬금없는 질문인가, 하겠지만 그 친구는 증권회사 취업을 앞두고 뭔지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나 봅니다. 생산적 노동이 아니라 돈으로 돈을 벌기 위해 마음 쓰는 사람들의 사정을 돌보아야 하는 금융업이란 게 교회의 교부들이 금지하였던 ‘고리대금업’과 다를 바 없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물론 원칙적으로 복음적일 수 있는 직업이란 게 없지는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일하는 농업이나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직업은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잉여재산을 처리하는 게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거나 사회복지와 쓸모 있는 생산을 위해 사용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루 종일 증권거래소에 앉아서, 또는 인터넷 앞에서 주가의 등락을 지켜보며 돈의 흐름만 바라보고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든지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한다고 믿지만, 사실 돌아보면 재산증식과 ‘돈’ 그 자체에만 매달려 일하기 쉽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이란 뭐든지 ‘돈’으로 결론이 난다고 믿는 까닭이겠지요. 그래서 한 때는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안녕하세요”라는 말 대신에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물질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 건강까지 돌보아야 행복하다는 말과 물질만 있으면 정신적 영적 건강도 유지된다고 믿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교부들은 영적 건강을 위하여 돈마저도 상대화시키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과 그분이 베푸시는 사랑에 참여할 때 얻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 안에서 안토니오 성인은 부유함을 마다하고 거친 사막으로 떠났으며,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교회 장상으로서 가난함을 취하고 권력을 멀리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St John Chrysostom, Northern Russia, early 17th century

황금 입을 가진 사나이, 요한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감동적인 설교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황금의 입’(크리소스토모)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던 성인입니다. 수백 개가 넘는 그의 <설교>(sermones: 미사 강론)와 <강해>(tractatus: 성서 특강)를 읽으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선포하던 요한의 뜨거운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요한은 347년, 안티오키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리바니우스라는 당대 최고의 학자에게서 수사학을 배워 변호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372년에 세례를 받고 그 꿈을 접었습니다. 세상 부귀와 명예가 자신의 복음적 열망을 채워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디오도루스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 들어가서 성서주석을 배우고 수행하던 요한은 얼마 후 독서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완전한 삶을 열망했기에 안티오키아를 떠나 4년 동안 수도 생활을 했으며, 그 후 2년 동안은 홀로 동굴에서 지내면서 날마다 성경을 되새김질하며 기도함으로써, 마침내 성경을 통째 외우게 되었지요. 그러나 오랜 고행으로 건강을 해친 요한은 고향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에 안티오키아 교회는 그에게 부제품을 주었는데, 요한은 5년 동안 부제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정성껏 섬기다가, 386년에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12년 동안 사제 생활을 하면서 깊은 성서 묵상으로 얻은 성찰을 강론 때마다 신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습니다. 요한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득권층의 고삐 풀린 사치와 부자들의 탐욕을 끊임없이 고발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가난한 사람)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배고픈 이들을 충분히 채워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 것으로 제단을 장식 하십시오. 여러분은 성전을 장식할 때 고통받는 형제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살로 된 성전이 돌로 된 성전보다 훨씬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에게 권고함

요한은 부자들이 불법으로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약탈하지 않는다면 죄가 없다고 믿는 데 반대하였습니다. 부자들의 죄는 그들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 데 있으며, 이는 일종의 강도질이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언제든지 죽어서 이승을 떠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 땅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착각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몸담아 살고 있는 집을 자랑하며 온갖 장식을 하지만, 우리는 잠시 땅에 머물다 가는 나그네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집이란 사실 영생으로 가는 길목의 ‘여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벽이나 머리 위의 지붕에서 평화와 안전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스런 은총의 벽에 둘러싸이고 하늘로 지붕을 삼고자 합니다. 사랑으로 이루는 선한 행실이야말로 우리의 살림살이 가구들입니다.”

그럼에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먹잇감을 노리는 들짐승처럼 맹렬하게 돈을 추적한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친구와의 우정도 그를 가로막진 못할 것이요, 자신의 양심을 추운 날 언 손가락처럼 마비시킬 줄도 안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 때문에 아파하는 이들을 보지 못하고, 그의 귀는 비참한 이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결국 탐욕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발합니다.

“가장 고약한 것은, 그가 자신의 탐욕에 대하여 고마워한다는 점입니다. 돈에 대한 갈망이 자기에게 생의 목표와 활력을 넣어준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이런 자세로 사는 한, 그에게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한의 개혁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넥타리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398년에 유명한 설교가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된 요한은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복음의 원칙에 따라서 과감하게 개혁했습니다. 에페소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성직을 사고팔아 돈벌이하던 주교 6명을 면직시켰으며, 세속적인 욕심에 가득 차 안락하고 화려한 삶을 누리던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냈으며, 부잣집만 골라 다니며 호사를 누리던 수도승들을 소속 수도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병원과 학교를 늘리고, 교구청의 쓸데없는 장식품과 가구들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 썼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 총대주교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냈지만, 모두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몇몇 주교들과 적대자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한편 요한의 선임자 넥타리우스 총대주교는 황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요한은 정반대로 처신했습니다. 그는 설교 때마다 황실의 허례허식과 사치를 준엄하게 꾸짖었으며, 특히 에우독시아 황후의 허영심과 탐욕을 모질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황후는 증오심에 가득 차서 요한을 내쫓을 기회만 엿보게 되었지요. 그러나 요한은 어떠한 정치권력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통치자들이 하느님께서 뽑아 세운 자들입니까? 그렇다면 저들이 제정한 모든 법률과 규정이 선한 것이요 따라서 이의 없이 복종해야 할 텐데, 과연 그렇습니까? 대답은 ‘아니’올시다. 많은 통치자들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여 거대한 재산을 모으느라 백성을 착취하고, 저들의 악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처벌하며, 이웃나라와 불의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저들의 법이 그릇되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에 불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는 땅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입니다. 만일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황후의 요청에 따라서, 평소에 요한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주교 등 36명의 주교들만 참석한 403년 ‘참나무 주교회의’에서 요한은 주교직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겁내지 않고 설교를 계속하였으며, 대성당에서 쫓겨난 채 콘스탄티누스의 목욕탕에서 부활전야 미사를 거행하다가 군인들에 의해 붙잡혀 갔습니다. 죽음을 예감했던 요한의 마지막 강론은 이러합니다.

“머잖아,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형제들과 누이들을 떠나야 할 것 같군요. 하느님이 주신 일터에서 나쁜 사람들이 나를 데려갈 겁니다. 나는 지금 슬픕니다. 비통합니다. 화가 납니다. 하지만 절망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희망을 느낍니다. 이 희망의 원천은, 비록 내가 육신으로 형제와 누이들과 이별하지만 영으로는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입증하십니다. ...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 비로소 사도들은 깊은 가슴으로 그분을 알게 되었지요. 마찬가지로 내 육신이 형제와 누이들을 떠날 때 나는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게 그들을 알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느끼는 이 슬픔은 녹아내리고, 비통한 감정은 달콤하게 바뀌고, 분노에 찬 이 가슴 또한 어루만져지겠지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린 사랑을 깨뜨려 부술 수 없습니다.”

요한은 곧 아르메니아의 작은 마을로 유배되었으나, 그의 영향력을 여전히 두려워한 반대자들은 황제를 부추겨 흑해 동쪽 해안에 있는 한 요새에 유배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요한은 넝마 조각으로 겨우 몸을 가린 채 차가운 가을비를 맞으며 맨발로 걸어서 먼 길을 가야 했지요. 결국, 유배지인 피티우스로 가던 길에서 탈진하여,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이라는 유명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요한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407년 9월 14일, 향년 60세였습니다.

그러나 인노첸시우스 교황은 412년에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그의 유해는 438년 콘스탄티노플 사도교회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1626년 5월 1일부터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동방교부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이들 중 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복음적 확신’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게 흘러가더라도,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세상 속에서 세상을 거슬러 행동하는 데 힘을 주는 굳건한 믿음과 내적 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자비를 믿는다면, 그 자비 안에서 목숨마저 내어놓았던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랑하고 그렇게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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