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특히 주교들에게 "양털 옷 같은 활동, 면 옷같은 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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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특히 주교들에게 "양털 옷 같은 활동, 면 옷같은 관상"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3.27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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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14

주교들은 종종 시토 수도회 공동체들에서 선택되었고, 베르나르드는 주교들을 공경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내적인 은총의 영감을 통해 순명에 의해서 알게 되는 하느님으로부터의 특별한 소명으로써만 얻어지는 주교들의 사도직과 그들의 권위에 대한 어떤 시기심에도 대해서 경고하였다.

베드로의 자리에 오른 첫 번째 시토 수도회 출신 교황인 그의 제자 유게니시우스에게 보낸 베르나르드의 편지는, 그가 교회 안의 공적 책임의 삶에 주어지는 요구들을 아주 잘 이해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의 첫 번째 걱정은 유게니우스의 내적인 삶이 그의 소명을 수행하는 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유게니우스에게 간결하고 명확한 권고로 묵상과 다른 연습들의 실천을 계속 촉구하였다:

"당신 자신을 전부 행동에 바치지 말고, 항상 활동적인 일들로 채우지 마십시오. 묵상을 위해,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시간을 간직하십시오!"

그러나 베르나르드는 기도의 삶이 항상 그래야 하는 것처럼, 가능하면 행동보다 기도가 능가되어야 하므로, 유게니우스가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쓰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자신은 현실주의자로 남았다. 활동적인 삶에서, 기도와 묵상, 하느님의 일에 관한 생각은 항상 우리 마음을 끄는 가장 거대한 견인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활동 중에서도 우리는 그것들에게 돌아가기를 갈망한다. 베르나르드는 유게니우스에게 오늘날 교회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모든 사람의 책상 위에 붙여놓을 수 있는 그런 유익한 말들로 교황기구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어디에서 시작할까? 일의 압력에서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만일 당신이 일을 미워한다면, 나는 당신과 공감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무엇보다 한탄할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이 없는 환자는 더 엄청난 위험에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비난받아 마땅한 일들이 당신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보아라!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이 일들 속에 무슨 결실이 있는가? 이 일들은 오직 거미집들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베르나르드는 자신의 관상적인 삶 때문에 우월감을 느꼈던 수도승들을 질책하는 일에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관상수도자가 훨씬 더 어렵고 위험한 소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서 결점을 발견하는 것은 창문 밑의 의자에 앉아 바느질하면서 돌아오는 군대의 병사들을 비난하는 여인과 같기 때문이다.

집에서 성급하게 실을 잣는 한 여인이 전쟁에서 돌아온 그녀의 남편을 질책한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만일 수도원의 어떤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는 고위성직자가 자기 자신을 덜 조심스럽게, 덜 신중하게 다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예를 들어, 말하고, 먹고, 잠자고, 웃고, 화내고, 판결을 내리는 일에- 그에게 갑작스럽게 경솔한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하라."

사진출처=Baltimore Sun

물론 관상의 삶을 위해 따로 떨어져 세상에서 떠나도록 불리운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알레드가 은둔자에게 쓴 편지에서처럼, "이것은 매우 사랑하는 당신의 몫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무덤에 묻혔기 때문에, 당신은 세상에 속한 모든 일에 귀먹고 말할 수 없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소명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뒤섞인 삶을 살고 행동과 관상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비록 관상이 본래 활동보다 우위에 있고 더 바람직하고 자유로워지는 만큼 관상을 추구해야 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종종 우리의 주의를 더 당면한 요구에 두기가 쉬운 것이다.

관상가는 필요할 때 적극적인 사랑에 양보해야 한다. 알레드는 ‘관상가들이 어떻게 관상의 기쁨 앞에 그들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두어야 하는지’ 말해주는 한 예로서,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가기 위해 영적인 기쁨의 예루살렘을 떠나는 열두 살 때의 예수의 이야기를 하였다. 또다른 강론에서, 그는 이같은 점을 다시 지적했는데, 활동적인 삶이 없는 관상은 어떤 사람도 완전함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우리의 선한 행위들은 두 가지 일들로 이루어진다,
이름하여 활동적인 그리고 관상적인 삶에서.
활동적인 삶은 양털 옷과 같고;
관상적인 삶은 면 옷과 같다.
앞의 것이 더 거칠고, 뒤의 것이 더 쾌적하다;
앞의 것은 외향적이고, 뒤의 것은 내향적이다.
활동적인 삶은 지옥의 추위에 대해서도 만족할 수 있고
죄의 모든 수치를 씻어낼 수 있다;
활동적인 삶 없이, 관상적인 삶은
이 죽을 운명의 영토에서, 어떤 사람도 완전함으로 이끌 수 없다.

베르나르드가 가장 좋아하는 말들 중의 하나는 함께 조화로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alternatio, 번갈아 일어남이다. 그는 어떤 감동적인 구절들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이 뒤섞인 삶이 어떻게 풍요로운 관상으로부터 흘러나오는가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관상을 넘어서 영혼들을 돌보라는 요청이다. 그는 신비스런 결혼, 아이가 없는 결혼이 아니라 아이들을 낳을 신비스러운 결혼으로 이 조화로운 삶을 설명한다.

그가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고백할 때에 나는 스스로에 대해 위안한다. ‘이 번갈아 일어나는 것 가운데, 마음은 그것들 중 하나에 더 집착하지 않을까 동요되고, 두렵고, 굉장히 격양된다...’ 그가 우리에게 (아가서에 대한 18번째 강론에서) 상기시키는 것처럼, 대답은 이런 조화가 하느님께로부터의 특별한 선물이며, 성령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미지로 되돌아가기에 적절할 때이다. 나는 그 이미지가 구체적이고, 활기차고,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더 추상적인 생각들이 꽤 위협적이 될 때에 내가 연관지을 수 있는 이미지라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에 두 여인, 두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한 집에, 한 지붕아래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완성시킨다.

그들은 자매들이지, 적들이 아니다. 예수는 그 두 사람 다 필요하였다. 그런 다음 내가 이것을 어떻게 나 자신에게 적용시키는지, 예수가 얼마나 마리아와 마르타 두 사람을 다 내 자신 속에서 찾기를 필요로 하는지알고 있다. 알레드는 그것을 매우 단순하게 표현했다:

기억되어야 한다
마르타가 노동하였고
마리아가 일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같은 집 안에서;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사람들의 같은 영혼 안에서
양쪽의 삶은 모두 인도된다,
각각의 고유한 시간, 장소, 그리고 질서 안에서.

그러나 내가 마리아와 마르타를 내 자신 속에서 얼마나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것은 긴급한 일이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하지 않으면, 마치 내 자신이 다른 방향들에 끌리는 것처럼 느끼듯이, 두 삶은 처절하게 갈라져 버릴 것이고, 그것은 너무나 지치게 하고 쇠약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열쇠는 최종적인 말씀의 질서 속에 있다.

베르나르드가 관상이 그 자체로, 활동보다 더 뛰어나고 더 낫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활동이 자주 관상보다 ‘더 좋거나’ 또는 ‘더 필요하다’고 나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하나가 혹은 다른 하나가 맞다고 나에게 말하고 있는 그런 죄의식에서 나는 자유롭게 된다. 대신에 그것은 ‘사랑의 질서’를 창조하는 상호작용이거나 그들 사이의 번갈아 일어남- 여기 아래에서 서로 공존해야 하는 사랑의 두 질서들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의 성장에 공헌’하지 않는, 우리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완전함은, 머튼의 단호한 말대로,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두 삶이 서로 함께 있어야 하는 목적이다. 스토아철학의 관점에서는 세네카가 주목했듯이, 활동과 관상 둘 다 예수를 따르는 삶에서 필수적이지만, 이 경우 지도 원칙은 개인적인 내적 고요함의 원칙이었다.

대신 그리스도인의 지도 원리는 사랑이다. 여기에 활동을 위한 기초가 있고, 어떤 나쁘게 생각되는 활동을 향해 돌진하는 우리를 지켜주는 교정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완전히 그리고 적합하게 줄 수 있도록, 우리는 하느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묵상 속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사랑의 상황 속에서만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다. 아가서에 대한 18번째 강론에서 말한 것처럼, 베르나르드가 '주입'이라고 부르는 우리 안의 하느님의 활동이 먼저 와야 하고, 그리고 난 다음에 '방출'(사랑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활동)은 유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왜, 만일 당신이 지혜롭다면,
당신은 저수지가 되고 수로가 되지 않는가?
왜냐하면 한 곳에서
그리고 같은 시간에 수로는 밖으로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자신이 받은 것을,
그러나 저수지는 물을 간직하고 있다
물이 완전히 가득 차고
그리고 난 다음에 넘친 물이 전해질 때까지
저수지 자체를 손상시키거나 불이익이 없이...

"비록 프살테륨은 바닥에서부터 그 소리를 내고, 류트는 꼭대기에서부터 그럴지라도, 프살테륨(14-15세기 악기)은 류트와 함께 즐겨야 하며, 류트의 소리가 프살테륨의 그것보다 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 다양한 길들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께로 여행하고 있다. "Ad idem tendunt, licet non eadem via; 그들은 같은 종착지에 이른다, 비록 같은 길을 통해서는 아닐지라도."

수호성인 축일의 복음 메시지를 듣는 평신도들은 결코 자신들을 하위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르타의 일이 마리아의 기도만큼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양쪽 다 필요하셨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양쪽 다 사랑의 질서로부터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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