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관상과 애덕, 기도와 실천의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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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관상과 애덕, 기도와 실천의 통합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3.1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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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13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Johannes Vermeer) 1632~1675

‘알아라, 형제들이여, 이승의 생활에서는 이 두 여인들을 절대로 분리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토 수도회의 수호성인 축일인 성모승천축일에 정해진 복음구절은 루가 복음 10장 42절로, 불가피하게 많은 강론들의 주제가 되었던, 베타니아의 집에서의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이다. 알레드는 형제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주목하십시오. 만일 마리아가 집에 혼자 있었다면, 아무도 주님께 음식을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마르타가 혼자 있었다면, 아무도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말씀을 맛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르타는 이렇게 행동을 상징하고, 그 노동은 그리스도를 위해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독서, 기도, 그리고 관상으로 주님의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 육체적인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휴식을 상징합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가난하고, 허기와 갈증과 유혹에 의해 지배를 받는 한, 이 두 여인들이 같은 집에 살고, 한 영혼 안에서 두 행위들이 일어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뒤 그는 청중들을 위해 그 밀접한 관계의 의미에 대해서 계속 말을 하는데, 청중들은 물론 이 경우에 전체 공동체로서, 가장 멀리 있는 농장들에서 온 수백 명의 평신도과 함께 성가대석의 수도승들을 의미한다:

마르타 때문에 마리아를 무시하지 말라,
아니면 마리아 때문에 마르타를 무시하지 말라.
만일 마르타를 무시하면, 누가 예수의 시중을 들겠는가?
그리고 만일 마리아를 무시하면,
예수의 방문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왜냐하면 그의 단맛을 보지 못할 것이 아닌가?
알아라, 나의 형제들이여, 이 삶에 필요한 것은
결코 이 두 여인들이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초기 시절부터 시토 수도회는 고독과 침묵을 위해 필요한 사막으로의 부르심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요구들과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는지 스스로 질문하면서 찾고 있었다. 어떻게 이 두 가지 삶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가? 행동과 관상의 결합이 가능한가? 그것은 물론 영원한 질문으로 남아 있으며, 나는 위대한 정직함으로 그 질문과 씨름했던 이 사람들로부터 빛이 비쳐지는 것을 발견했다.

문제는 물론 수도생활의 경험에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수도승들의 교부인 안토니오 자신도, 사람들이 사막의 고독 속에 있는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과 그런 삶의 유형이 참여와 물러남이 함께 있는 삶임을 알게 되었다. 그 거룩한 사람은 순례자들에게 그리고 치유자와 신기한 일을 하는 사람을 찾는 사람들에게 목적지가 되었는데, 적절한 아이러니로 피터 브라운이 말한 것처럼, ‘이집트 은둔자들의 독방들은 상담실들을 잘 갖춘 곳으로 고고학자들에 의해 드러났다.’

사진출처=kupczyk.com.pl

베르나르드 자신은 세상과 수도원을 다 알았고, 그의 삶 속에서 양쪽의 요소들을 균형잡기 위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노력하였다. 그는 관상 속에서 하느님과 일치해 있던 순간으로부터 이웃을 섬기기 위해 떨어져 나갔던 경험을 쓰고 있다. 그는 모든 참된 관상가가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체험을 증명하게 되는 것은 애덕의 요구라는 제약에 민활하게 승복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는 수도원 외부에서 시간의 반을 보냈는데, 외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의무라고 느꼈던 것을 필수적인 과업이라고 보면서 정치와 교회 일에 관여하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 가장 강력한 권력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가끔 지나친 것 같은 열의로써 조정하는 유럽의 중재자, 정치인, 정치가였다.

베르나르드는 무엇보다도 그의 영감을 진복팔단에서 발견하였다. 샤를르 뒤몽은 베르나르드와 디트리히 본회퍼 사이에 흥미진진한 비유를 들었다. 본회퍼는 이 세기에 교회의 무심한 형식주의와 정면으로 씨름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는 교회에 영적 활력이 없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만일 내가 산상설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내적인 정직함과 성실함을 가질 수 없다고 믿는다. 이것은 활력의 유일한 원천이다.”

하지만 평범한 무명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도원장직을 사임한 오겔이라고 불리는 수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나르드는 그에게 의무불이행을 책망하였다. “당신의 휴식은 외부의 유익함보다도 더 당신을 기쁘게 합니다.” 그는 이것을 거짓된 겸손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는 참된 거룩함이 결정되는 평범한 사랑(ordinatio caritatis)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실제 편지는 단호하다:

“나는 당신이 스스로 짐을 내린 것을 축하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하느님을 모욕한 것이 두렵습니다. 당신은 그분에 의해 올림을 받은 후 당신자신을 스스로 비하했으며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불손한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당신을 들어 올려서, 그분의 일을 하도록 하는데도 당신이 자신을 위하여 휴식을 취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충고보다도 당신자신의 충고를 더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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