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에, 편애(偏愛)를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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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편애(偏愛)를 권함
  • 한상봉
  • 승인 2017.03.15 17: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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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얼마 전 국민의당 안철수가 “저는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에 모두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문재인을 비판하며 “정치인은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헌법적 절차 안에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면서 “그런 역할을 할 사람이 광장의 한쪽에 서 있으면 그런 역할을 못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한 것이다. 광장은 시민에게 맡기고, 정치인은 국회로 가라는 말일 텐데, 정치인도 시민의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안철수의 발언은 반은 옳고 반은 그르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잠시 안철수의 이 말이 “저는 촛불집회의 편도 아니고 태극기집회의 편도 아니”라는 말로 들려서 마음이 불편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이 기사가 걸린 SNS에 “결국 안철수는 이편도 저편도 아니고 자기 편이라는 뜻이군”이라는 댓글이 달린 것을 보았다. 헌법재판소에서 파면당한 박근혜 역시 “나는 나의 편”이라는 태도만 보였다. 삼성동 집으로 들어가면서 “그동안 저를 성원하고 지지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했으니,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자가 그저 “팬클럽”의 성원에만 응답한 꼴이다. 박근혜는 그 팬클럽 가운데 세 분이 자기를 위해 시위하다 돌아가셨는데, 그 불운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처럼 박근혜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뿐이다. 그런 대통령이 “조국과 결혼했다”니, 어림없는 발언이다. 박근혜는 회칠한 무덤 같은 청와대에서 나와 민중이 숨쉬는 갈릴래아로 간 것이 아니라, 게라사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처럼 또 다른 무덤으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거기서 다른 악령들과 더불어 서툰 춤을 다시 출지 모른다. 이편도 저편도 아닌 ‘삼성’동 공화국 안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형제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고 했다. 참혹한 현실 앞에서 중립은 “사랑 없음”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역시 어느 편에 서지 않았다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선 예수님이 ‘만인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만인사랑법은 ‘편애’를 통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누구의 편에 섰을까? 물론 하느님 편이다. 그럼 하느님은 어느 편에 섰을까?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하느님이었고, 노예들에 대한 편파적 사랑으로 만인을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 시대의 고통받는 백성들, 대다수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서민들 편이었다. 그분이 이런 사람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았기에, 예수님 역시 가난한 민중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사실상 예수님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러니, 하루 밤낮 사이에 어이없이 목숨을 빼앗겼겠지, 생각한다. 

예수님은 하느님 백성의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을 옥죄고 있던 성전체제에 맞서 싸웠다. 그분이 가야파의 저택에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침묵을 지킨 것은 “그들과 말조차 섞고 싶지도 않았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까지 다정하게 말을 건네던 분이었다. 죄지은 여인에게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독이신 분이었다. 도무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연거푸 하느님나라에 대해 비유를 드시고 설명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분이었다. 그들에게 빵을 주고 생선을 구워 주시던 분이었다. 세리였던 자캐오와 한 식탁에 앉았고, 세리와 창녀들이 유대 종교 엘리트보다 더 먼저 하느님나라에 가리라 약속하신 분이었다. 그런 분이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에게는 말을 아끼셨다. ‘독사의 족속들’이라 다그쳤다. 그분의 편파적 사랑은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by Sister Mary Grace, OP

며칠 전 일산 어느 서점을 빌려 홍성담 화백의 세월호참사 그림전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강화 사는 함민복 시인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 함께했던 분이 뒷풀이에서 함 시인의 시를 무릎을 치며 읽어 주었다. <비 2>다.

비는 
물의 싹

낮은 곳으로 
자란다

슬픔도 
그런가


눈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죽으러 올라가시면서 세 번씩이나 ‘수난 예고’를 하셨다. 그리고서 “내가 죽으면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 있을 것”이라 했다. 고난의 땅 갈릴래아, ‘땅의 사람들’인 암하레츠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헤로데 왕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보고 어느 제자가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감탄하자, 예수님은 매몰차게 한마디 남긴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2) 바리사이들이 잘난 척하고, 성전사제들이 가엾은 백성의 등을 후리는 동안, 예수의 시선은 가난한 과부의 렙톤 두 닢에 주목한다. 그들 가엾은 목숨들에게 희망이 되기 위해 그분은 죽으시고 또한 부활하셨다. 그분의 철저한 편파성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낳았다.

다시 안철수를 생각한다. 그는 살면서 어떤 고난을 받았을까? 언제 어디서 민중을 위한 헌신의 시간을 만들어 내었을까? 그가 입만 열면 반복하는 ‘새 정치’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나는 안철수가 인간적으로 선한 품성을 지녔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착한 바리사이’가 아니었을까. 성전 세력을 비호하는 짓은 낯부끄러워 거절하지만, 그렇다고 민중을 선택하지도 않는다. 그는 가난과 억압과 고난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분명한 사랑의 숨결을 알지 못한다. 모든 부활에는 십자가의 상흔이 짙게 배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우유부단한 당파성, 적이 없는 것은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절박한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게 안철수가 영원한 2인자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분명한 선택과 결단은 항시 부담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노예처럼 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던 예수님처럼 “낮은 곳으로 자라는 눈물”이 없는 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도 없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도 없다.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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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학 2017-03-16 10:41:37
착한 바리사이라는 말이 참 적실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