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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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신앙
  • 김경집
  • 승인 2016.04.2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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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많은 사람들이 약수터에서 줄지어 서있다. 그 사람들은 왜 이른 아침 커다란 물통 들고 부지런히 산에 올라 그 물을 받으려 할까? 약수에 함유된 다양한 미네랄이 건강에 좋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집에서도 마시려고, 혹은 집에 있는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들통 가득 약수를 받는다. 그러나 약수를 마셔서 그가 건강해졌을까? 물론 거기에 들어있는 어느 정도의 미네랄이 도움은 될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오염된 약수가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약수를 마셔서 건강해진 게 아니다. 약수터까지 힘들여 오른 운동이 그를 건강하게 해준 것이다. 뻐근해진 다리와 가쁜 숨이 그를 건강하게 해준 것이지 그저 그 물을 마셨다고 건강해진 게 아니다. 그건 마치 어떤 일이 생기고 난 뒤의 결과에 대해 편의적이고 불완전하게 인과적으로 해석하는 것일 뿐이다. 힘든 운동 뒤의 갈증을 말끔히 씻어주는 약수는 고맙다. 게다가 다행히 좋은 성분까지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우리가 그 물을 마셔서 건강해진 게 아니라 산에 오른 운동 덕에 건강해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경우 좋은 성분의 미네랄이 들어있는 약수는 ‘좋은 덤’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나쁜 균이 있다면 그 약수는 ‘독’일 뿐이다. 그게 약수와 건강의 함수 관계의 본질이다.

약수를 마시러 산에 가야겠다고 결심하는 건 자신의 건강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심각한 문제를 인식해서 생긴 것이다. 그게 몸에 좋다는 걸, 내 건강은 내가 챙겨야 한다는 걸 스스로 깨달았을 때 비로소 집에서 편히 쉬거나 더 자는 걸 과감하게 단념하고 이른 아침 산에 오른다. 아무 생각 없이 물통 들고 산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저 남들이 좋다니까, 그 물 마셨더니 건강에 좋더라니까, 혹은 뜻하지 않게 불치병도 고쳤다는 말을 들어서 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자신의 건강 상태에 관심을 갖고 점검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약수에는 무관심한 채 산에 오른다. 물병에 물을 담아가서 그 물 마신다. 다른 물은 못 미더워서, 또는 그 물에 오히려 대장균이 더 많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보도를 들었기 때문에 그런 경우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냥 산에 오른 후 갈증에 약수 한 모금 마시며 그 물에 고마움을 느끼는 이도 있다. 약수 때문에 산에 오른 게 아니라 산에 올랐다가 때마침 약수터가 있어서 약수를 마신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차를 타고 올라와 트렁크를 가득 채워서 담아간다. 남들이야 어쩌거나 말거나. 그걸 하루에 다 마시지도 못할 것이다. 여러 개의 냉장고에 저장해두고 두고두고 마신다. 이미 미네랄도 변질되었을지도 모를 그 물을 탐욕스럽게 마신다. 냉장고 문을 여는 만큼만 몸을 움직이는 운동(?)으로 그 물 마시는 가족들이 정말 그 물 때문에 건강해질까?

나자렛에서. 사진/한상봉

“나는 예수를 믿는다,” 또는 “나는 부처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게 그 사람 신앙의 정체성의 바탕이다. 그런데 도대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게 믿음인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의무감으로 혹은 기복적 마음으로 주기도문이나 성모송 외고 성호경 열심히 그으면 살아서 복을 얻고 죽어서 천당 간다고 여기는 게 참신앙인가? ‘나무아미타불’만 열심히 읊으면 극락에 간다는 게 참된 신앙인가? ‘믿는다’는 것은 ‘안다’는 걸 전제로 한다. 알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서 그를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러니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알아서 믿음을 갖는가? 그저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부처 믿으면 극락 간다고 믿는다면 그건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그건 그저 과다한 보험이거나 로또와 다르지 않다. 예수를, 또는 부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와 부처의 행적을 ‘알고 믿고 따른다’는 것을 함축하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 읽고 불경 읽으며 그 삶과 행적을 더듬는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최소한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믿음이라는 건 자칫 무모한 이념이 될 수밖에 없다. 그건 종교도 신앙도 아니다. 어리석은 신념일 뿐이다. 그리고 그 신념 또는 이념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주체성도 상실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괴롭힌다.(물론 자신은 그걸 괴롭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소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중세 유럽의 우매한 교회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그걸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어리석은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차라리 아예 신앙을 갖지 않는 게 낫다. 어리석고 편협한 종교심만큼 치유하기 어려운 고질병도 없다. 그걸 역사에서 얼마나 많이 봐왔는가. 아니 지금도 그걸 지겹도록 보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21세기에도 그 우매와 탐욕이 줄어들긴커녕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으니 불가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할 지경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이들이 자신들은 성경이나 불경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실천하고 있다고 대꾸할 지도 모른다. “네가 아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하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무조건 들이대면서 믿으라고, 믿으면 천당 가고 극락가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할 일이 아니다.

내가 예수 믿고 부처 믿어 구원되고 덤으로 이승에서 복까지 받는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을까만, 우리의 믿음은 안타깝게도 자꾸만 이념화 되거나 믿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일탈이 사실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을 놓쳐서 그런 건 아닌지 함께 반성해봐야 한다. 약수를 마셔서 건강해지는 게 아니라 그 약수 마시러 산에 오르기 때문에 건강해진다는 점을 진중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도 그 약수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댄다. “이 물 한 번 잡숴봐. 온갖 질병 다 씻은 듯 낫고 부자도 될 수 있어!”

정작 산에 오르지는 않으면서 그 물 마시면 온갖 병 다 고치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 물 한 모금이 주는 갈증의 해소와 적당한 행복을 맛보며 그 물에 대한 과대광고가 무작정 사실인 듯 빠져드는 이들도 많다. *플라시보 효과일 수도 있고 희망 섞인 자기암시일 수도 있다는 건 까맣게 모른다. 그런 플라시보 효과가 다행히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남들에게도 그 물이 좋다고 선전한다. 심지어 제 돈 들이고 제 시간 헐어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그 물 마셔보라고 권한다. 어떤 경우는 갈증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억지로 그 물을 마셔보라고, 마셔야 한다며 강요한다. 심지어 때로는 오염된 물을 강요해서 멀쩡하던 사람까지 병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그 물을 마셔야 한다고 외친다. 그리고는 정작 아무도 산에 오르지는 않는다.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는 의학에서 약물작용에 의하지 않은 약물의 치료효과, 투약효과에 수반되는 심리효과를 말하며, 약리학적으로는 전혀 활성이 없는 약물을 환자에게 치료약이라고 믿도록 하는 정보를 주어 질병에 유효한 작용이 나타난 경우를 말한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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