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하르트, "가난한 있음, 그것이 우리 본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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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 "가난한 있음, 그것이 우리 본모습"
  • 유대칠
  • 승인 2017.03.13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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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3
사진출처=pixabay.com

[유대칠 칼럼-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3]

이상하게 ‘가난’이란 말은 쉽지 않다. 불편하다. 부유하고 싶다. 그냥 종교적인 수사어구로 사용될 수 있지만 일상의 삶에선 쉽지 않다. 가난한 삶을 이야기하는 누군가도 모임에선 자신의 비싼 아파트를 돌려 자랑하기 급하다. 서글픈 듯이 보이지만 이것이 인간사(人間事)다. 어쩌면 나도 그렇다. 나도 인간이다. ‘더’ 멋지게 살고 싶고,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높임을 받고도 싶다. 그런 인간이다.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먹고 싶고, ‘더’ 좋은 것을 입고 싶고, ‘더’ 좋은 소득을 가지고 싶다. 어쩔 수 없는 나도 그런 인간이다. 

‘더’ 좋음을 알게 되면, 가지고 싶다. ‘더’ 좋은 것이라 알게 된 것은 쉽사리 머리를 떠나지 않고, ‘더’ 좋은 것이라 가지게 된 곳은 온 힘 다해 잡으려한다. ‘더’ 좋은 것이라 욕심내는 것은 내 삶을 부여잡는다. 나도 그렇다. 조금 자유롭고 싶지만 쉽지 않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남들이 쉴 때 나는 앞서야 하고 앞선 만큼 이겼다 좋아할 것이다. 더 노력했으니 더 가져야하고, 더 가졌으니 마땅히 더 행복해야 한다 생각한다. 나도 그렇다. 아마 다들 이럴 것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덜’ 좋은 것을 가진 자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다. 부러워하는 시선 앞에서 은근히 승리감을 즐기고 싶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욕심을 내고 살아도 여전히 허무하다. 더 좋은 것에 집착하고 집착해도 돌아오는 것은 허망함뿐이다. 채우는 만큼 비워지는 것도 커진다. 그 불안감이 더 큰 욕심을 만들고, 더 커진 욕심으로 더 커진 불안감을 채워도 그 허망함을 모두 채울 수 없다. 그냥 그렇게 산다.

에크하르트의 존재론적 가난, 하느님 품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후기 중세 철학자 ‘에크하르트’는 존재론적 ‘가난’을 이야기 한다. ‘버리고 있는 모습’이 진정 우리의 참 모습이라 한다. ‘가난한 존재’ 말이다. 부유한 존재는 더욱 더 힘들게 하는 거짓된 우리의 모습을 참된 것이라 속일 뿐이라 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우린 무엇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론적 가난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존재다. 그런데 타인과 비교하는 것을 배운다. 비교를 통해 ‘더’와 ‘덜’로 세상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

더 많은 것을 얻어야한다. 덜 공부해도 안 되고 덜 노력해도 안 된다. 남들보다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해야한다. 공부도 노력도 결국은 더 좋은 것을 먼저 얻기 위한 방법이다. 어찌 보면 인생이란 치열하게 남을 이기고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는 싸움이다. 그 싸움으로 우린 행복을 누리려 한다. 항상 더 좋은 것은 차지해야하고, 덜 가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며 불안해해야한다. 그 불안감에 더 집착하며 더욱 더 욕심을 내게 된다.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그냥 내려두라 한다. 가난하자 소리친다. 이제 제발 좀 가난하자 한다.

쉽지 않다. 더 좋아지고 싶다. 그것이 자신의 본모습이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존재론적 본모습은 가난이다. ‘대통령으로 있음’도 ‘공장 노동자로 있음’도 결국은 ‘있음’이다.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참모습이다. 그 참된 근본에 충실하자 한다. 우린 원래 무엇으로 있는 존재가 아닌 그냥 있는 존재다. 그것이 가장 분명한 우리의 참 모습이다.

‘대통령으로 있음’에서 그 대통령이 가지는 찰라의 권력을 본 모습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을 소유하고 유지하기 위해 참으로 추한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 불법을 저지르며, 그 찰라의 모습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미 독재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대통령’이란 그 찰라의 이름이 참된 있음은 아니다.

참존재의 얼굴은 ‘있음’이다. 그 ‘있다’이란 사실에서 ‘대통령’도 ‘노숙자’도 그리고 ‘해고 노동자’도 모두 ‘하나’다 하나의 ‘있음’으로 뿐이다. 에크하르트에게 그 ‘있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느님이며, 그의 품이다. 하느님이 품지 않은 존재는 처음부터 없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품속에 있다. 하느님의 품속에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본을 가진 재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있음’이 있다. 오직 ‘있음’이란 그 가난한 모습으로 있다.

무엇으로 있으려 노력하는 아집에 찬 모습은 순수한 우리 존재의 본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가린다. 우리가 아집으로 유지하려는 그 아집이 하느님 품속에 있는 우리를 가리고 불안하게 만든다. 무엇인가 더 소유해야한다는 불안감을 심어준다. 이미 충분히 평화로운 하느님의 품인데 말이다.

신성한 그 '가난한 있음'을 '개돼지'라 부르면 안 돼

에크하르트의 설교

아집에서 벗어나 서로의 참된 존재론적 본모습을 볼 때, 에트하르트에게 모든 존재는 그저 하느님의 품속에 있는 작은 몸짓이다. 하느님의 모습을 품고 있는 하느님의 품속에 있는 거룩하고 신성한 존재들이다. 지금 길거리를 보자. 무엇인가 물건을 파는 이의 있음도 하느님의 품속이다. 청소하는 이의 있음도, 아이와 웃으며 놀고 있는 어린 어머니의 있음도 마찬가지다. 뜨거운 햇살 아래 농삿일을 하는 일꾼의 있음도 다르지 않다. 해고노동자의 있음도 외롭게 아파하는 모든 사회적 약자의 있음도 모두가 하느님의 품안에 있다.

그 모두가 존재론적으로 하느님 품안에 한 가족이다. 하느님의 품안에 ‘있음’으로 하나 된 가족이다. 에크하르트는 수도원이나 대학의 강의실도 아닌 민중들이 공간으로 찾아가 그들에서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귀에 알맞은 설교를 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가진 자들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닌 민중의 언어로 민중에게 다가갔다. 진정 신성한 곳은 아집으로 자신의 신성함을 고집하는 곳이 아니라, 그저 일상 속 작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 있음들 가득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품속 소중하고 신성한 그 가난한 있음을 향해 누군가는 '개돼지'라고 했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존재론적 참모습인 ‘가난한 있음’이 아니다. 그 있음이 잠시 입게 되는 옷을 본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남에게 어찌 보이는가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는 사람으로 보여야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보인다면, 적당히 작은 일상의 존재들을 무시하며, 그 무시의 밖에 자신이 있음을 즐기려한다. 그러나 기억하자. 그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니다. 그가 보는 모습은 우리의 참된 본모습이 아니다. 그가 노력하는 그 모습도 그의 참된 본모습이 아니다. 모든 아집에서 벗어난 아무 것도 아닌 순수한 있음, 그 가난한 있음으로 있는 우리가 가장 참된 본 모습이다.

무엇이 되기 위하여 집착하고 욕심내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행복을 주지 못한다. 참된 행복은 바로 가난하게 있는 우리의 본 모습으로 가능하다. 에크하르트의 이런 존재론은 이후 많은 여성 신비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무시 받고 소외받는 여성들도 하느님 품안에 ‘가난한 있음’이다. 절대 무시 받고 소외받아야할 존재가 아니다. 그런 존재는 없다.

에크하르트의 이러한 존재론은 높고 낮은 위계의 질서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가진 자들에게 강한 반발을 샀다. 그러나 그의 철학을 많은 이들을 통하여 쉼 없이 이어졌다. 지금 여기 작고 작은 사람도 하느님의 품안에 있는 귀중한 사람을 알려주며 쉼 없이 이어졌다. 가난한 있음, 그 소중함을 이야기하며 쉼 없이 이어졌다. 쉼 없이 말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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