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파면 "두려움을 떨치면 축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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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파면 "두려움을 떨치면 축제가 된다"
  • 김경집
  • 승인 2017.03.1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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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지난 가을 눈이 시린 날, 시청 앞 광장에 섰다. 분노로 인해 거기에 섰다. 수많은 시민들은 대통령이 무능하고 무지하며 민주주의를 망가뜨릴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분노해서 촛불을 들고 모였다. 어떻게 그토록 엉망일 수 있을까. 오죽하면 ‘이게 나라냐?’라는 푸념이 그대로 가슴에 꽂힐까. 겨울 추위는 매웠지만 촛불이 있어 따뜻했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이 겨우내 이어졌고 이른 봄까지 이어졌다. 주말마다 광화문은 촛불로 가득했다. 그리고 기어이 불의한 정권을 합법적으로 쫓아냈다. 위대한 승리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때 시청 앞은 절망과 저항의 전쟁터였다

1980년 봄 시청 앞은 폭력과 공포, 절망과 저항의 전쟁터였다. 박정희의 죽음 뒤 군부의 반란은 유신독재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군정의 시작을 암시했다. 광주에서 민주화 항쟁과 학살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학교 안에 갇혀 교문 밖을 나가지도 못했던 대학생들은 끝내 교문을 넘어 서울역 광장에 모였다. 길을 나설 때는 수백 명이었지만 가는 도중에 시민들까지 합세했고 서울역 광장에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저항과 민주주의 열망의 거대한 용광로였다.

전투경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서로 필사적이었다. 어찌어찌 겨우겨우 남대문을 뚫고 시청까지는 다다랐다. 그러나 거기에서의 대치는 어마어마한 폭력과 쉼 없이 터지는 최루탄 세례로 끝났다.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당시 지도부가 처음부터 광화문을 넘어 청와대까지 가는 건 염두에 두지 않았고 어느 선에서 회군하기로 결정했다는 후일담도 나왔다. 그때 의장인지 하던 학생은 국회의원이 되었고 국회부의장까지 올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보수정치인이 되었다는 게 지금도 믿기 어렵다.

물론 각자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있으니 남 일을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도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본다. 힘의 중심에서 멀어질지 모른다는, 잊힐지 모른다는, 그리고 이미 맛본 권력의 맛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현실과 타협하게 만들고 어물쩍하는 사이에 보수와 수구의 혼탕 속에 몸을 담그게 했을 것이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너도 나도 적당히 타협하고 두려움을 감추며 세련되고 표 안 나게 복종하며 그 대가를 지불받으며 적응한다. 그러니 나 홀로 독야청정 해봐야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내 주변 사람들까지 시달리게 할 뿐이다. 탐욕과 두려움의 교묘한 이중주다.

서울의 봄 관련 사진

적당한 두려움이 적당한 타협을 낳는다

자동차들이 달리던 도로가 막히면 둘 중 하나다. 교통사고나 체증이 아니라면 직책이 아주 높은 인물이 지나가거나 시위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헌법에 보장된 사상과 표현 그리고 집회의 자유마저 노골적으로 억압하는 사회에서 저항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 자체가 이미 헌법의 가치를 파괴한 것인데 다른 사람들에게 저항은 꿈도 꾸지 말라며 위협을 가하기 위해 그 처벌이 가혹하다. 그렇게 저항은 말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저항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저항은 처절하다. 그래서 자동차가 멈춰 서고 사람들이 도로를 차지하게 되면 돌과 화염병 그리고 곤봉과 최루탄이 난무한다. 80년 그 서러운 봄 시청 앞 아스팔트 도로는 치열한 저항과 폭력적 진압의 아수라장이었다.

공자는 꼭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하지 않는 것이 '비겁'이라고 말했다. 두려움의 대상이 정작 그 실체를 보이지 않을 때 뜻밖에 사람들은 더 두려워한다. 그따위 대상은 사실 두려울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왜 두려워하는가. 적당한 두려움의 대상을 내 안에 품고 있어야 적당히 타협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누구나 불의에 분노한다. 그러나 정작 그게 내 일만 아니라면 적당히 눈감는다. 저항하다 손해를 보면 그것에 더 분노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거기에 휩쓸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기특해한다. 물론 처음에는 미안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했지만 몇 차례 반복되면 자연스럽게 인지부조화의 방어벽 뒤로 숨는다. 그렇게 우리는 비겁해진다. 87년 항쟁으로 잠시 그 비겁이 극복되는 듯했지만 퇴행의 정치는 다시 우리를 비겁과 타협하게 했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 서는 것은 그렇게 두렵다. 늘 그랬다. 그런데 미국 쇠고기 수입의 졸속 타결과 방역주권의 포기에 분노했던 이명박 정부 시절의 촛불 집회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축제처럼 평화롭고 활력이 넘치는 것을 경험하게 했다. 무려 두 달 넘게 수십만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적당히 체념하고 아예 정치에 무관심하는 것을 택하는 이들도 생겼다. 그 체념과 외면이 그 다음 박근혜 정권의 타락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악은 끝까지 성실하다
선은 걸핏하면 돌부리에 엎어진다

박근혜 정부가 과거로 퇴행하며 민주주의 가치와 공정한 경제 가치를 망가뜨리고 짓이기는 것을 보면서 불안했던 시민들은 마침내 그 마각이 드러나면서 분노하고 시청과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손에 손 잡고 촛불을 들고 모였다. 경찰도 더 이상 시민들을 억누르지 못했다. 급기야 청와대 코앞까지 길을 내줬다. 아무도 불법적인 정권과 공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연대와 공감의 힘은 거셌다. 시민들은 주말마다 축제를 벌였다. 농담처럼 ‘주말이 있는 삶’을 보장하라며 너스레떨면서도 내내 즐거웠다. 두려움을 떨쳐내면 연대는 축제가 된다는 것을 경험한 것은 미래를 위한 소중한 자산이다.

결국 진실과 정의는 승리했다.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와 정의를 말살한 대통령 박근혜에게 파면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 유린에 치른 대가는 혹독하고 참담하다. 몰라서 그랬을까? 두려워서 그랬을까? 포기해서 그랬을까? 두려움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했을 때 비겁이 비집고 들어온다. 일찍이 대니얼 디포가 말했다. 위험에 대한 공포는 위험 그 자체보다 천 배나 더 무겁다고. 악은 끝까지 성실하다. 반면 선은 걸핏하면 돌부리에 엎어진다. 비겁은 공포를 빌미로 가장 못난 나와 타협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가장 큰 비겁은 가장 작고 가벼운 일에 대한 합리화의 변명이다. 이제는 더 이상 비겁해져서는 안 된다.

시청 앞 광장에 다시 섰다. 거의 40년 전의 공포는 더 이상 그 광장에 존재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비민주적이며 정의롭지 않은 정부에 대한 저항이 그 자체로 축제가 되며 두려움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렇게 두려움을 털어내는 것이 과연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도 그렇게 이어지는지는 아직 미정이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흔히 저질러지는 그릇된 관행과 낡은 사고에 저항하고 바꿔야 한다. 두려움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더 나아가 내 안에 있는 부당한 두려움의 실체를 파악하고 추방해야 한다. 탄핵을 끝내 얻어내고 시청 앞에서 광화문을 향해 걸어가며 내내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두려움을 떨쳐내면 축제가 될 수 있음을. 이제 다시는 퇴행을 야만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이사 40, 1~2)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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