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의 그 사람, 이미 만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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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그 사람, 이미 만났는가?
  • 한상봉
  • 승인 2017.03.1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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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에밀리 디킨슨은 “천사는 너희 이웃에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인생에서 만나는 누구라도 무심하게 흘려보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네게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려줄 것이라는 전갈이다. 이런 기회는 이렇게 사람으로 오기도 하고, 책으로 오기도 하고, 어떤 특별한 장소에 대한 감흥으로도 온다. 어떤 이들은 광야에서 이런 체험을 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면서 만났다고도 한다. 어떤 이는 광장의 촛불에서 하느님을 보았다고 한다.

내 삶의 향방을 가늠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보자면 함석헌과 젊은 시절의 김지하, 장일순과 이현주, 그리고 김수영과 황지우로 이어지는 시인들이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만큼 중요한 사람이 헤르만 헷세이며, 버트란트 러셀이다.

특히 러셀이 남긴 “사랑으로 고무되고 지식으로 인도되는 삶”이라는 슬로건은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와 레오나르도 보프의 신학적 언설보다 직접적이다. 하느님 없이 하느님을 알아가는 법을 스콧 니어링이나 간디나 체 게바라에게서 배우는 재미도 쏠쏠하다.

토머스 머튼

그중에 우뚝 서 있는 한 사람이 토머스 머튼이다. ‘기도의 사람’이라는 머튼에게 영감을 주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머튼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도승이 되기 전에 만났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인도의 수도승 브라마차리(Brahmachari)였다. 머튼의 자서전 <칠층산>에서는 이렇게 그를 묘사하고 있다.

“수줍어 보이는 갈색 얼굴을 한 키 작은 사람이 아주 행복한 듯 이를 다 드러낸 채 만면에 웃음을 띠고 서 있었다. 그는 붉은색 잉크로 기록된 힌두교의 기도문이 담긴 노란 터번을 쓰고 있었으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브라마차리는 인도철학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머튼이 서양 신비주의 전통에 눈을 뜨도록 도와주었다. “그리스도교인이 쓴 아름다운 신비주의 저서들이 참 많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토머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두 책을 꼭 읽어야 합니다.” 머튼은 이 말을 해주려고 브라마차리가 먼 인도에서 자신에게로 왔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느님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할만한 방법으로 당신의 메시지를 전해주시곤 한다.

머튼이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자극을 주었던 사람도 컬럼비아 대학의 학생잡지 <제스터> 편집위원이었던 로버트 랙스였다. “로버트 랙스는 그들 가운데 가장 키가 컸고 진지해 보였는데, 말처럼 긴 얼굴에 검은 머리채가 풍성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고뇌에 사로잡힌 듯 보였다.”(칠층산) 머튼이 랙스를 “햄릿과 엘리야를 합쳐놓은 것 같은 인물”이라고 했다.

랙스는 유대인이었는데, 어느 봄날 뉴욕6번가를 걸으면서 그가 느닷없이 물었다. “자넨 대체 뭐가 되고 싶은 건가?” 머튼이 답했다. “모르겠어. 그저 좋은 가톨릭신자가 되고 싶다고 해두지.” 랙스는 “좋은 가톨릭신자? ... 성인이 되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야?” 어떻게 나같은 인간이 성인이 되냐고 머튼이 묻자, 랙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성인이 되기를 바람으로써.”

머튼은 훗날 “이들은 (가톨릭신자는 아니었지만) 나보다 훨씬 나은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하느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교부 테툴리아누스는 “신자들의 삶의 목적은 지옥에 면하는데 있지 않다”고 했다. 예수님 역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고 했다.

그 방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그 사랑이 “원수를 사랑하라”(5,43)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사실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자기를 박해하고 자기를 미워하는 이까지도 하느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사랑스럽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식을 키워본 사람들은 안다. 부부가 항상 사랑을 나누는 것도 아니다. 가정을 꾸려 본 사람은 안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했다.

도로시 데이 역시 노숙인들을 사랑하기 위해 늘 ‘기쁨의 의무’를 상기시켜야 했다. 노숙인들이 사랑스러운가? 그렇지 않다. 그래도 계속 사랑하려다 보면 그들도 사랑스러워진다. 때때로 그들 안에 숨겨져 있던 하느님이 드러나, 배고픈 얼굴에도 온기가 스민다.

우리는 위대한 순교영웅이나 성인, 작가와 시인에게서만 영감을 얻지 않는다. 예수님도 가난한 식민지 백성이었고, 유대 변방의 나자렛 사람이었다. 학력도 보잘 것 없고 내세울 것 하나 없이 희생된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자. 그런 사람을 주님으로 모시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참 묘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종교다.   
 

*이 글은 의정부교구 소공동체 잡지 <나무그늘>3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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