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는 노예들의 종교 "사랑은 십자가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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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노예들의 종교 "사랑은 십자가에 도달한다"
  • 한상봉
  • 승인 2017.03.06 12: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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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그리스도인은 ‘경계’에 사는 사람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교회와 세상의 경계,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두 세계 사이의 긴장을 놓치지 않고 모두 품어 안으면서 모두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자기만의 우상’에 빠져들지 않는다. 사순절이다. 고난 가운데 희망을 사는 계절이다. 죽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세상 속에서 거룩함을 엿보는 시간이다. 땅에 얼룩진 땀방울과 핏자국 위에서 천사처럼 가볍고 은총처럼 맑은 하늘을 기약하는 때다. 그렇게 노예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성찰의 시간이다.

독일신학자인 도로테 죌레는 <고난>(한국신학연구소,1993)이란 책에서 시몬 베유를 기억하며 그리스도교를 ‘노예들의 종교’라고 불렀다. 가혹한 현실을 뚫고 희망을 찾아가는 집단이 그리스도인이라 했다. 충분히 아파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고난을 감당하고서야 닿을 수 있는 길이 ‘예수’였다. 시몬 베유는 수학과 신비주의, 유다교와 가톨릭, 고대철학과 마르크스주의 ‘문지방’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었지만 땅에 깊숙이 박힌 십자가에 매달렸던 그 사람처럼. 시몬 베유는 세례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이었다.

십자가는 사랑에 대한 세상의 응답

시몬 베유

시몬 베유는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성장했으며 학업을 마치고 철학교사가 되었다. 휴가기간엔 1년 동안 르노자동차 공장에서 금속절단공으로 일했다. 그는 <공장일기>에서 이 시기를 “노예 같은 삶”이라 불렀다. 노동자들에게 연민을 느낄 뿐 아니라 노동자가 되고자 했던 사람이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고자 했을 뿐 아니라 가장 가난한 인간이 되었고, 마침내 사형수가 되었던 것처럼. 이걸 시몬 베유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랑의 운명’이라 불렀다.

도로테 죌레는 “사랑은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사랑은 결국 십자가에 도달한다”고 했다. 스팔타쿠스의 지휘아래 봉기한 노예들이 십자가로 로마시내를 더럽혔던 것처럼,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상징이라지만, 그것은 신학자들이 발견한 것이 아니다. 비참한 삶에서 해방되려고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세상(권력)의 답변이 십자가였다.

사랑은 고난을 원하지 않는다. 예수 역시 고난을 피할 수 있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도 있었고, 처음부터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도 좋았다. 그러나 사랑은 고난당하는 이들과 더불어 희망을 낳기 위해 피할 수 없었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어려움에 빠지고 고통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성가신 구설수에 오르지 않으려면 아예 처음부터 남을 돌보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역설의 종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시몬 베유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암담한 상태라 해서 우리가 사랑하기를 그칠 때, 하느님은 정말 없어진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유족들처럼 납득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잠기더라도 하느님은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존재하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내가 계속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을 때 문득 그분을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바닥에 기는 자들의 종교

교회는 연중 사순절 동안에만 ‘고난’을 어두운 얼굴로 강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이 ‘고난’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신자들이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바닥에서 기는 자들이 높은 자들에게 저항하는 종교”이며 “천한 자의 복음은 복음을 천하게 만든다”고 했다. 예수에 대해 “비천한 민중, 추방된 자, 죄인들을 지배질서에 대항하도록 불러 모으는 이 거룩한 무정부주의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베리아로 전해지고 있을 복음이 믿을만하다면 한마디로 정치범이었다”고 했다. 그리스도교는 주인의 가치를 부인하고 파괴하는 노예의 도덕이라는 것이다.

이 도덕의 핵심가치는 가련한 자에 대한 ‘동정’(compassion)이다. ‘동정’은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이다. 귀족이나 엘리트는 타인에 대한 ‘거리 두기’에 능숙하다. 노예들은 불쌍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거리두기에 실패한 사람이 예수이며,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가 ‘노예들의 종교’임은 분명하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에집트에서 구출하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신 분이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원천에 ‘노예들’이 있었다. 그들 신앙의 조상들은 떠돌이였고 농노였고 용병이었고 노예였다. 불행의 낙인이 찍힌 자들이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예수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으로 기적을 베풀고, 병자를 치료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아예 고난 받는 자들과 자신을 일치시켰다.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해 고난을 받았으며,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노예처럼 살며, 노예들의 해방을 희망하고, 비참 속에서도 계속 사랑하는 것이다.

Station IV, Charles Aldrich (출처=http://sacredartpilgrim.com)

그리스도의 친구는 고난받는 자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땅 전체를 그 껍질에서부터 중심까지 눈물로 적신 사람들의 슬픔”에 대해 공감하는 이반은 죄 없는 자와 어린이들의 고난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알료사, 나는 신을 승인하지 않는 게 아냐. 하지만 나는 아주 정중히 그분에게 입장권을 돌려주겠어.” 이반은 납득할 수 없는 고난을 허용하는 하느님께 격분하며 “사랑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는 하늘에 있는 권력자에게 저항한다. 동생 알료사는 일어나서 격분한 이반에게 다가가 말없이 입을 맞춘다. 예수가 종교재판소에 끌려가 대심문관에게 했던 것처럼. 알료사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지 않는다. 알료사는 고난 받는 이들의 곁에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짊어진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반은 세상의 고통을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평가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알료사는 관객이 아니라 배우가 되기를 희망한다. 도로테 죌레는 “인간이 고난을 받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그 곁에 계신다”고 했다. 그리스도는 우월한 위치에서 도움을 주는 자로 나타나지 않고 오직 그들과 함께 고난 받는 자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친구는 고난 받는 자들이다.

이쯤 되면 ‘입장권’을 반납하고 싶은 마음이 내게도 생기지 않을까 두렵다. 노예가 되고 싶은 사람은 노예들 가운데서도 없을 것이다. 예수도 고난을 피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교회 역시 전례 안에서만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확인 할 게 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실 고난이 아니라 행복이다. 복음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 그러나 어디서 누군가 슬픔에 젖어 있을 때, 고통으로 신음할 때 그 소리를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 역시 그분이시다. 그 사랑 때문에 신열을 함께 앓고 계시는 분이 그분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그 자체가 어떤 수행의 도구나 거룩한 경험이라서가 아니라, “다만 사랑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과 고통을 나누게 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고백하면서.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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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2017-03-13 13:36:49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