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침묵 앞에 신발 벗을 준비가 되었나 "Ich bin der Ich 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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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침묵 앞에 신발 벗을 준비가 되었나 "Ich bin der Ich bin"
  • 김유철
  • 승인 2017.02.2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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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의 Heaven's door

[김유철의 Heaven's door]

영화 스틸사진

이름이 아닌 선언

차마 하늘의 존재를 이름 지어 부를 수 없어 다석 유영모 같은 이는 “없이 계신 이”라고 불렀다. 아주 오래 전 모세가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 있는 호렙산에서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만나고 신발을 벗으며 만난 그 존재는 “당신이 누구냐?”는 모세의 물음에 스스로 목소리 내어 자신의 근거를 보여주었다. 하늘 경배가 남달랐던 히브리사람들에게 그 존재는 ‘YHWH’라는 모음 없는 히브리자음 네 글자였다.

그것은 그저 “나는 있는 나”라는 선언이었다. 뒤에 사람들이 모음을 조합하여 여호와(YeHoWaH)라는 인위적인 이름이 등장했지만 그것은 하늘의 존재를 담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존재는 그저 ‘있는 나’로서 ‘I AM'일 따름이었다.

영화 <위대한 침묵>

2009년에 우리에게 소개된 영화 <위대한 침묵>은 160분이 넘는 긴 영화였다. 어쩌면 그 영화를 보는 일은 감상이기보다는 체험에 가까운 일이다. 침묵하는 법, 그리고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 겨울에서 시작하여 다시 겨울이 오는 동안 알프스 산자락 1300미터에 있는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정물화 그 자체였다. 공동체 상영을 준비한 관계자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 걱정이 되었는지 “이 영화는 ‘위대한 침묵’이 아니라 ‘위대한 수면’이 될 수도 있다”고 밉지 않은 엄살을 부렸지만 영화는 분명히 ‘위대한 I AM’이었다.

독일사람 필립 그로닝 감독은 몇 가지 자막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애썼다. 첫 번째로 그가 선택한 것은 막스 피카르트의 시 <침묵의 세계>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감독은 이어 핵심적인 성서구절이자 이번 영화의 결론을 시작 2분 만에 곧장 제시했다. 그것은 구약성경 열왕기에 나오는 ‘있는 나’의 존재방법이었다.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열왕 상. 19.11-12)

그로닝 감독은 영화의 엔딩 장면에도 이 대목을 다시 자막으로 걸었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영화 스틸사진

살아내기

겨울, 봄, 여름, 가을, 다시 겨울. 늙은 수도사와 신입 수도사. 햇빛과 바람 그리고 구름, 밤과 아침 다시 낮과 저녁. 세탁물을 맡은 이, 부엌일을 맡은 이, 대장간을 맡은 이와 대외업무를 맡은 이. 그 속에서 그들은 침묵으로 하루를 온전히 살았다. 아니 살아냈다. 기도와 미사와 홀로됨과 독서와 청소와 밥 먹기를 하면서. 그렇게 살아냈다.

침묵은 어느 종교 할 것 없이 수행의 전제조건이며 목적이기도 하다. ‘겉나’가 침묵할 때 비로소 피어오르는 ‘속나’의 목소리. 불이 지나간 뒤에야 나타나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존재의 목소리. 그래서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듣는 행위, 귀를 여는 것이다. 커튼을 흔드는 햇볕의 내리쪼임 안에도 존재가 계시고, 수선화가 아침이슬 머금고 피어 올리는 꽃대 안에도 존재가 계시고, 골목길 가로등 위로 눈 내리는 소리와 파란 풀잎이 자라는 생명 속에도 존재는 침묵보다 더한 침묵으로 계시는 듯하다. 그것을 다시 한 번 ‘I AM’이라 부르고 싶다.

이상한 조합 '태극기‧성조기‧십자가'

침묵이 아닌 소란으로 자신을 앞세우는 사람들은 스승 예수의 길을 외면한다. 그것도 철저히 이상한 조합으로. 그런 조합 속에는 예수도, 조국도, 애국도 모두 뜨내기손님으로 겉돌 뿐 끝내 일상으로 체화된 부활은 결코 살아낼 수 없을 것이다. 스승 예수의 온유함(마태 11.29)은 따뜻한 부드러움이다. 겸손(humilitas)이란 대지(humus)이다. 우리는 대지 위에 두발을 딛고 살아간다. 대지 위에 집도 짓고 농사도 짓고 공장도 짓는다. 대지에 온갖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파묻기도 한다. 우리가 죽으면 한줌 흙이 되어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다. 대지는 모든 것을 포용하며 새 생명을 싹트게 한다. 대지는 겸손이며 죽음이고 부활이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대지이다. 예수는 세리도, 창녀도, 죄인도, 약하고 병든 자도 모두 받아주신다. 죄 많고 상처투성이일지라도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은 새 생명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예수 닮기를 원하는 사람을 신앙인이라 한다.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하신 말씀대로 온유하고 겸손한 신앙인의 길. 그 길속에서 만나는, 만나야 하는 태극기와 성조기와 예수의 십자가가 뒤범벅이 된 우리의 지금 여기, 참 부끄러운 일이다.

영화 스틸사진

오직 하나 ‘I AM'

<위대한 침묵>이란 영화가 상영되고 일 년이 지난 2010년 ‘무소유’의 법정스님께서 입적하시던 날, 육신을 벗고 말 그대로 스님께서 ‘무소유’가 되던 날, 그 날은 슬프면서도 기뻤다. 온 적도 없고 간 적도 없는 스님의 동그란 안경과 나무의자를 생각하는 일은 알프스산에서 만난 수도자들의 얼굴을 보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영화 끝 무렵 “주님이 나를 부르시니 내가 이곳에 있습니다.”란 영상의 크레딧이 반복되며 수도자의 얼굴을 하나씩 보여주었다. 다르면서도 하나의 얼굴인 그들은 오직 하나 ‘I AM'이었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긴 침묵을 깨고(!) 늙고 눈먼 수도자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눈썹이 하얀 수도자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린다면 무슨 이유로 계속 살아가야 합니까?”라고 말했다. 그 말이 주는 긴 여운은 영화 끝난 지 9년이 지나도록 온전히 남아있다. 늙은 수도자가 ‘하느님’으로 표현한 것을 나는 무엇으로 말할 수 있는가? 무엇에 대한 생각으로 나는 계속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 살아내고 있는가?

여운의 끝자락을 알아차렸는지 감독은 빙긋이 웃으며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참 친절한 감독이다. 딱 한 줄의 독일어. “Ich bin der Ich bin” 호렙산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속에서 모세에게 들려주던 그 존재의 목소리다. “나는 있는 나다”란 목소리가 들린다면 신발을 벗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김유철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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