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의 복권, 앙리 드 뤼박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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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의 복권, 앙리 드 뤼박 추기경
  • 로버트 엘스버그, 임선영 역
  • 승인 2017.02.2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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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신학자, Cardonal Henri de Lubac, 1896-1991

“가장 확실하고 대담한 그리스도교의 노력, 가장 새로우면서도 오래 지속될 노력은 언제나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번성한다.”

Cardonal Henri de Lubac

앙리 드 뤼박은 1991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5세.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준비한 위대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 1896년 2월 20일 북부 프랑스에서 태어나 1913년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이후 리옹 대학 가톨릭 신학 학부에서 근무하였다. 젊은 신학자 시절에는 당시 가톨릭계를 지배하던 이성주의적 신스콜라학파(Neo-scholasticism)에 반대하였다. 저서를 통해 고전적이며 보다 영성적인 전통, 즉 초기 교회 전통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였다. 1938년 처음으로 출판된 <가톨릭시즘(Catholicism)>은 이러한 주장을 표현한 고전으로 남아있다.

가장 유명한 저서는 <초자연적인>(Surnaturel)으로 인간의 "자연적 운명"과 "초자연적 운명"을 구별하려는 신스콜라주의적 해석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구분은 인간은 독립적 존재이며 초월성에 대한 어떤 본질적 성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해석이라 비판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적 전통과 모리스 블롱델과 같은 철학자의 연구를 기반으로, 드 뤼박은 인간은 자연적 개방성과 초자연에 대한 갈망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하느님과의 일치는 인간의 진정한 소명이라고 주장했다.

1950년 발행된 회칙 <인류>(Humani Generis)를 통해 비오 12세 교황은 드 뤼박의 저서들을 비난했다. 비난의 대상은 "새로운 신학"으로 모순되게도 이 별칭은 좀 더 오래된 교회 전통에 근거하여 근대 교회의 가르침에 의문점을 제시한 신학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검열 받지 않은 신학 수업이나 저술 활동은 금지되었다. 그는 이 "침묵의 시기"에 문학과 불교로 관심을 돌렸다.

하지만 교황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준비하면서 드 뤼박을 신학 전문가로 준비위원회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계시 헌장>(Constitution on Revelation)>과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Pastoral Constitution on the Church in the Modern World)을 비롯한 공의회 주요 문서들을 작성했다.

힘든 시기를 겪었으나 드 뤼박은 언제나 교회에 헌신하고 순종하는 사제였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1950년대에는 급진적이라고 비난받았으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오히려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둘 모두 드 뤼박의 영성적 해석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못 한다. 그는 초기 교회의 지혜와 전통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면 초기 교회의 신비주의가 현대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기에 당시 교회의 가르침에 반론을 제기했다.

1983년 그간 교회에 공헌한 바를 인정하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앙리 드 뤼박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번역: 임선영 아우구스티나
원문 출처: <모든 성인-우리시대를 위한 성인, 예언자, 증인들>(All Saints), Robert Ellsberg, crossroad, 1997, 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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