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을 외롭게 두지 않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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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외롭게 두지 않는 하느님
  • 유대칠
  • 승인 2017.02.20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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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2

[유대칠 칼럼-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1]

삶은 쉽지 않다. 중세 역시 생존의 공간이다. 살아남기 위해 온힘을 다해 싸웠다. 살아남아야 했다. 잔혹한 몽골군의 공포 속에서도 흑사병의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했다. 기적이란 없었다. 그래도 살아남아야했다. 그것이 중세이고, 13세기 중세였다.

중세 교황 중 최고의 권력을 누린 인노첸시오 3세(재위 1198-1216)가 교황이 되기 전 쓴 책은 중세 유럽인들이 생각한 현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바로 중세의 대표적 베스트셀러인 <인간 처지의 비참함>(De miseria condicionis humane)이다.

인간 처지의 비참함 "교황과 민중이 느끼는 고통은 달랐다" 

이 책이 소개한 비참함 가운데 하나는 돈이다. 12-13세기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돈은 인간을 편하게 해주었다. 굳이 땅을 일구는 힘든 육체노동과 거대한 토지 없이 부유해질 수 있었다. 논밭에서의 힘든 손발이 아닌 사무실의 두뇌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었다. 그 새로운 가치는 부유함을 선사해주었다.

서서히 노예제도라는 사회적 위계도 힘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돈이 새로운 위계의 기준이 되어갔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민중에게 삶은 인간 처지의 비참함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일 뿐이었다. 많은 이들은 대출금의 이자를 해결하지 못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뿐이 아니다. 몽골군의 잔혹한 공격 때, 인노첸시오 4세(재위 1243-1254)는 몽골의 구유크 칸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있으니, 용서를 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구원을 받으라는 편지였다. 이에 몽골의 칸은 천하가 모두 자신의 권력 아래 있으니, 이것이 곧 하느님이 뜻이라며, 교황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라 직접 와 머리를 숙이고 항복하라 답장을 했다. 현실을 모르는 교황의 무지를 조롱한 셈이다.

사실 로마의 교황은 민중이 느낀 몽골군의 공포를 직접 느끼지 못했다. 13세기 민중의 아픔은 외로웠다. 민중은 몽골군에 의해 죽어야했고, 5-8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교황과 황제에 의해 죽어야했다. 거기에 13세기 말엽에 흑사병이 찾아왔다. 유럽 인간의 3분의 1을 죽인 공포였다. 그뿐인가, 13세기 중엽은 매서운 추위의 ‘소(小)빙하기’마저 찾아왔다. 날씨도 민중을 힘들게 했다. 이 힘든 고통의 대부분은 민중의 몫이었다. 13세기 유럽은 살기 힘들었다.

하느님은 이해 영역 밖에 있다

Mechthild von Magdeburg

이런 잔혹한 현실 앞에서 막데부르크의 메히틸드(1207-1282/1294?)는 고민했다. 과연 하느님은 어떤 존재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이 고통 속에 하느님은 왜 침묵하고 있는가?

당시 많은 신학자들의 개념 속 하느님은 가장 완벽한 ‘이성’이었다. 이성이란 앎의 주체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느님은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모르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박학한 하느님이다. 우주의 모든 원리를 하나도 남긴 없이 알고 있는 하느님이다. 그러한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 인간에게 남겨진다. 따라서 인간 가운데 가장 강렬한 하느님의 흔적은 ‘이성’이다.

이성이 곧 하느님의 모상이 되었다. 더욱 더 하느님에게 다가가기 위해 이성을 통하여 더욱 더 치열하게 고민하며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과연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온전히 이해될 수 있을까? 멕히틸드에게 하느님은 이해의 영역 밖에 있다. 개념 속에 구속되지 않는다. 하느님은 인간 이성의 논리적 건축물 속에 존재하는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멕히틸드 "가장 선명한 하느님 흔적은 사랑"

그녀는 자신의 주저인 <신성이 흐르는 빛>(Das fließende Licht der Gottheit)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녀의 존재론과 신학을 감히 ‘사랑의 존재론’ 혹은 ‘사랑의 신학’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 정도로 그는 사랑을 중시한다. 사랑으로 하느님을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것이 하느님과 인간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 가운데 남겨진 가장 선명한 하느님의 흔적은 ‘이성’이 아닌 ‘사랑’이다.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고 개념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남으로 존재하는 타자를 향한 사랑, 바로 그 사랑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남긴 참다운 흔적이라 보았다. 즉,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이다.

더욱 더 깊이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인간은 더욱 더 원형에 다가간다. 원형의 사랑에 더욱 더 깊이 다가간다. 사랑은 소유를 위해 있지 않다. 사랑은 소유욕이 아니다. 사랑은 공유의 기쁨이다. 함께함으로 우리가 되는 것이 사랑이다. 설사 사랑으로 자신의 기쁨이 줄어들어도 우리의 기쁨이 더 커짐으로 더 큰 행복을 누리는 것이 사랑이다. 자신에게 나쁨도 우리의 기쁨이 된다면, 행복이 된다. 나쁨도 행복이 된단 말이다. 이것이 고난도 그저 불행이 아닌 행복이 되는 이유다.

사진출처=stevedowood.tumblr.com

하느님 사랑은 벽이 없다

멕히틸드는 십자가의 예수를 이야기한다. 그 사랑은 인간이 가진 사랑의 원형이다. 철저하게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이다. 인간은 이러한 사랑을 자신의 삶에서 구현하면 구현할수록 더욱 더 원형의 사랑과 하나가 된다. 어찌 보면 이웃을 향한 나의 사랑이 더욱 더 강하면 강할수록 나는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결국 우리 안에 타인을 향한 사랑에 더욱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그리고 벽도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다. 그것이 원형의 사랑이다. 우리의 사랑이 따라야할 모범, 바로 그 원형이 사랑이 그렇다.

13세기, 민중이 그리워한 하느님은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박식한 하느님이 아니었다. 자신을 외롭게 두지 않는 사랑 가득한 하느님이었다. 외로운 아픔, 교회권력도 국가권력도 안아주지 않은 외로운 아픔을 안아주는 사랑의 하느님이었다.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며 아파하는 지금의 자신을 사랑하는 그런 하느님이었다.

나와 내 이웃의 내면에 머무는 하느님의 모상도 서로가 서로를 개념화 하며 자기라는 작은 틀 속에 머무는 ‘나르시즘’의 모습이 아닌, 타자를 향한 사랑이길 원했다. 이것은 멕히틸드, 그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13세기 많은 여성들이 그리워한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었다. 철저하게 외로운 아픔 속에서 무너지는 자신을 안아주는 사랑의 하느님 말이다. 교회와 국가의 이익이란 이름에 가려진 외로운 아픔을 안아주는 하느님 말이다.

멕히틸드는 인간 처지의 비참함을 이겨낼 마지막 희망으로 사랑을 든다. 외로운 아픔 앞에 민중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그런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지금의 우리처럼 말이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삶은 쉽지 않고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비참한 삶의 기적은 우리네 사랑이 더 침묵하지 않은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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