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성인을 그린, 에이드 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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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성인을 그린, 에이드 베선
  • 조프리 노우스
  • 승인 2017.02.2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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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e Bethune, 1914~2002

“나는 당나귀이고 그래서 기분이 좋다.” 이 글은 로드아일랜드 주 뉴포트의 노인들을 위한 거주지인 하버 하우스에 있는 에이드 베선의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문에 달려 있었다. 이 하버 하우스는 에이드가 시작했고 그의 끝없는 노동과 지치지 않는 노력 덕분에 2001년 문을 열었다.

에이드는 2002년 5월 1일 노동절에 세상을 떠났다. 1월부터 그는 폐렴으로 고생해 왔고 결국 백혈병이 도졌다. 그는 88세였다. 장례식은 그 주간 토요일 화창하고 따스한 아침에 200여 명의 친구들, 친지들과 마을 사람들이 나라간세트 만이 내려다보는 포츠머스 수도원에 모인 가운데 치러졌다.

에이드의 조카들이 그의 소박한 나무 관을 들었다. 이 관은 에이드가 28세에 직접 만들어 집안의 현관에 오랫동안 놔두었던 것인데, 집들과 주님이 계시는 자리를 재미있게 색칠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참으로 진귀한 작품이었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노래를 불렀다. “오 주님, 영원한 휴식을 그에 게 허락하소서. 그리고 영원한 빛이 그에게 비추게 하소서.”

미사는 담백한 그레고리안 성가로 간소하게 거행되었다. 합창도 오르간도 없이. 어떤 우스꽝스러움도 전혀 없었다. 에이드와 꼭 닮은 미사였다.

Ade Bethune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셨느냐가 아니라
어떤 분인가 하는 사실이다”

줄리안 스테드 수도원장은 짧은 강론에서 화가이며 디자이너로 살아온 에이드의 풍요로운 삶에서 세 가지 예를 들었다. 그날 아침 교회에 걸려있었던, 에이드가 만든 커다란 착한 목자 직물, 원장은 이것이 에이드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지만 거의 전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가톨릭일꾼> 신문을 위한 그림들, 그리고 하버 하우스의 완성을 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그의 품성에 대해서, 원장은 오랜 교직생활 속에서 그가 관찰했던 것을 말했다. 에이드는 학생들이 절대로 흉내내지 않았던 유일한 선생이었다. 선생들의 뒷전에서 그들을 모방하고 흉보는 일이 학생들의 기쁨 중의 하나인 것이 확실한데도 말이다. 에이드는 남학생들을 “나의 들소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복도와 계단을 뛰어 다니는 모습이 대평 원의 들소들 같다고 비유하면서.

스테드 원장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했던 말을 인용하였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간결한 모습, 그 모습이 바로 에이드 였다. 그리고 그는 옳았다.

에이드의 관이 교회에서 옮겨져 비스듬한 잔디밭을 내려가 묘지로 옮겨질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오 주님!” 하고 노래했다. 사제가 “당신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천사들이 당신을 낙원으로 인도하며 노래할 것이니!” 그리고 나서 에이드의 남동생인 안드레와 조카들 그리고 손자 손녀 조카들이 비옥하고 촉촉한 검은 흙을 무덤 속의 관 위에 뿌렸다.

에이드 베선, 지금여기에서 ‘살고 일하는’ 성인을 그리다

에이드는 어머니와 가족과 함께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황폐한 벨지움에서 뉴욕으로 건너왔다. 그는 우수한 건축과 디자인 학교들 중 하나인 쿠퍼학교에서 공부했다. 1933년 가을 겨우 19살 때에 수줍고 진지한 에이드는 그때 뉴욕 이스트 15번가에 있었던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에 두 개의 옷가방을 들고 찾아 왔다. 도로시 데이는 그가 집이 없는 노숙자인줄 알고 그날 잠 잘 곳이 없다고 사과하였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난 후 둘은 이 우스꽝스러운 혼동에 웃음을 터뜨렸고, 도로시는 에이드에게 신문 에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에이드는 현대 세계에서 살고 일하는 성인들을 그렸다. 그는 <가톨릭일꾼> 신문의 로고를 디자인하였으며, 이 로고는 그가 그린 그림 중에 가장 오랫 동안 남아 있다. 1930년대 후반에 그는 어머니와 함께 뉴포트로 이사했는데, 이곳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그는 유명한 돌 조각가인 하워드 벤슨과 함께 일하기 위하여 뉴포트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는 도로시 데이의 딸인 타말 헤네시도 있었다.

그는 유화, 그림, 글씨,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책 디자인 등을 가르쳤다. 후에 그는 뉴포트에서 성 레오라는 가게를 열었다. 1983년 에이드는 가톨릭일꾼 운동 50주년을 기념하여 전국의 모든 가톨릭일꾼 공동체들이 모인 모임에 참석했다. 뉴저지 주의 달링턴에서 3일간 모였을 때 에이드는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포크댄스를 가르쳤다.

에이드는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전례 미술가가 되었다. 이콘을 그리고, 상본, 스테인드글라스, 직물과 성물들을 만들었다. 그는 성당 건물 디자인에 관해서도 자문을 해주었다. 또한 많은 잡지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하버 하우스를 짓는 일에는 기금 모으기, 허가, 논쟁 그리고 뉴포트 시 정부의 승인이 필요했다. 관료들과의 격론, 불화도 일어났지만, 에이드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한결같은 정신을 갖고 있었다.

by Ade Bethune

충만한 인간성을 일깨우는 예술
“천국과 지상, 길거리와 따스한 가정의 일치”

그는 생의 마지막 시기와 가지고 있던 돈을 가정 같고 친절하며, 은혜롭고 사랑스러운 노인들의 거주지를 만드는데 다 바쳤다. 그는 하버 하우스의 침실 디자인으로부터 손잡이 크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관여하고 정성을 쏟았다. “손잡이는 손이 작은 노인들에게 알맞게 좁아야 합니다!”라고 그는 건축업자에게 주장했고, 다시 한 번 그가 옳았다.

그는 중세기의 특징인 천국과 지상, 길거리와 따스한 가정의 일치라는 전체적 비전에 뿌리를 두는 예술관, 노동관을 갖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우리를 하느님 창조의 공동협력자라고 불렀다. 그의 예술은 단순히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는 이에게 경외감과 신앙의 실재에 대한 자각, 희망을 주는 거룩한 신비,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충만해지는 인간성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죽음을, 마지막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이 단지 시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가 1999년 4월 <예술가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썼듯이, “아름다움을 찾는 한 ... 예술은 그 속성상 신비에 대한 접근이며 호소와 같다. 예술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구원에 대한 전 우주적인 갈망을 소리로 표현하고 있다.”

에이드 자신이 고안한 선종카드는 천상 예루살렘을 그리고 있다. 상본 뒤에는 단순하고 간결 한 요청이 있다. “에이드 베선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그는 자신이 천상도시에 즉시 들어가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평화 속에 쉬시기를.


출처_ , 2002년 6-7월호. <참사람되어>, 2010년 9월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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