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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 맞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 입성한 예수예수의 마지막 일주일-1강 : 종려(성지)주일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1강 : 종려(성지)주일]

이제 곧 사순절이 오지만, 부활절 없이 사순절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고통 받기를 차처하는 것은 신경증적인 현상일뿐이어서, “모든 성인들은 고통 받기를 차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그래서 그분의 공덕에 동참한다는 ‘보혈’신학은 참 위험하기 짝이 없다. 가난한 이들이 일상으로 겪는 ‘강요된’ 고통마저도 신화화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순절이면 떠오르는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지금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의 참상”은 외면하면서 ‘고통’ 그 자체를 성화의 길로 제시할 때, 메츠가 말했던 ‘위험한 기억’을 되살리는 영화가 아니라 ‘피학적 사이비신앙’을 유포하는 영화가 될 수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인 ‘예수 세미나’의 일원인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니코 크로산이 지은 <마지막 일주일>(다산초당, 2012)은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먼저 ‘Passion’이란 말의 이중적 의미를 타진한다. ‘Passion’은 ‘고난당함’을 의미하는 라틴어 ‘Passio’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일상 영어에서 ‘Passion’은 열렬한 관심이나 헌신적인 ‘열정’을 뜻한다. 결국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이 빌라도의 사법재판에 의한 ‘수난’으로 이어졌다고 봐야 옳겠다. 실제로 예수 안에서 비폭력적인 정의를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폭력적인 불의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예수는 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래아와 유대 광야에서 보내며 정치적 분쟁지역에서 비교적 떨어져 지내다가 생애의 마지막에 가서야 예루살렘에 집중했다. 공관복음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행을 단 한 번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서는 네 번 이상 기록한다.

한편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처형을 당한 시점은 논란이 있다. 빌라도는 기원전 26-36년 사이 유대 총독이었다. 모든 복음서는 예수가 안식일 직전 금요일에 죽었다고 기록했는데, 안식일이 금요일 저녁 일몰부터라면, 그날 아침녘에 처형되었을 것이다. 또한 유월절 직전 아침에 처형되었다고 하는데, 유월절은 항상 매월 15일 즉 만월에 시작되니까, 빌라도 재위기간 중 유월절이 금요일 저녁에 시작된 해는 30년과 33년이다. 한편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죽을 때 사방이 어두웠다고 전하는데, 33년 4월 3일 금요일 저녁, 예루살렘에서 부분월식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더 신빙성이 높다.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Christ's Entry into Jerusalem, 1842_Hippolyte

성지주일, 너무 다른 두 행렬

예수 일행은 나사로와 마르타, 마리아 자매가 살던 베타니아에서 머물다 올리브 산을 넘어 겟세마니를 거쳐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했다.

성지주일, 성주간 첫날 우리는 어느 봄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두 행렬과 마주친다. 첫 번째 행렬은 예루살렘 동쪽에서 들어오는 초라한 예수의 행렬이고, 다른 행렬은 이두매와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는 빌라도 총독이 로마의 기병대와 보병들을 이끌고 서쪽에서 들어오는 행렬이다. 빌라도는 서쪽으로 약 60마일 떨어진 행정수도 가이사랴 해변에서 오는 중이다. 제국의 군대는 투구와 병기들, 깃발들을 앞세우고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입성하고 있다. 쩔렁거리는 말고삐 소리와 태양에 반사되어 빛나는 금속들, 그리고 군화소리가 이 행렬을 지켜보는 유대인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로마의 제국주의 신학이 빛나는 순간이다. 황제는 단순한 로마의 지배자가 아니라 ‘신의 아들’이었다. 아폴론 신에 의해 어머니 아티아에게서 태어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기원전 31년부터 기원후 14년까지 로마를 지배하며, 지상에 평화를 가져다 준 ‘하느님의 아들’이며 ‘주님’이고 ‘구원자’로 숭배되었다. 14년부터 37년까지 다스린 티베리우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예수의 행렬은 어떠한가? 제국의 지배에 항의하는 것처럼, 예수는 한 번도 멍에를 맨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미리 계획된 ‘반대행동’(counterprocession)를 전개한다. 이는 마치 ‘계획된 정치시위’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즈카르야(스가랴) 예언자의 상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르야 9.9) 이 나귀를 타고 오는 왕은 군사력에 의한 로마의 평화와 다른 평화, 샬롬을 바라는 ‘평화의 왕’이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9,10)

예수의 행진은 성전 맞은 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빌라도의 행진에 대한 의도적인 대결이었다. 빌라도가 제국의 권력과 영화, 폭력을 과시했다면, 예수의 행진은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할 것은 빌라도는 아침햇살에 눈을 부비며 동진(東進)하였으며, 예수 일행은 아침 햇살이 내려앉는 성전을 바라보며 서진하였다. 빌라도는 예수일행의 있는 방향에서 비추는 햇살을 감당하였고, 예수일행은 빛 가운데로 나아갔다.

사진=한상봉
<지도출처=<가장 길었던 한 주> 닉 페이지, 포이에마의 사진 캡처

하느님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

빌라도와 예수가 상징하는 세력이 맞섰던 예루살렘은 어떤 도시인가? 그 도시는 하느님의 도시인 동시에 불신앙의 도시이며, 희망의 도시인 동시에 박해의 도시이고, 기쁨의 도시인 동시에 고통의 도시이다. 이 도시는 빛과 어둠의 두 세력을 모두 비추고 있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다윗왕국을 이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언제나 다윗의 아들이 회복시킬 새로운 예루살렘을 꿈꾸었다. 솔로몬이 기원전 900년경에 성전을 지었을 때, 이 성전은 하느님과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땅에 충만한 하느님의 영광이 선포되고, 그분이 머무시는 거처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성전은 희생제사가 드려지는 유일한 장소였으므로, 성전은 하느님의 임재와 하느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성전이 이처럼 하느님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신앙의 중심지였고, 순례의 목적지였다.

예루살렘이 ‘하느님의 도성’이라는 것은 시편에 줄기차게 드러난다.

“주님의 집으로 가세!”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이미
우리 발이 서 있구나.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
“너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안하여라.
네 성안에 평화가,
네 궁궐 안에 평안이 있으리라.”
(공동번역 시편 122,1-2, 6-7)

귀족통치와 창녀의 도시, 예루살렘

그러나 다윗왕이 죽고 50년도 되지 않아 예루살렘은 정치-경제-종교적 억압의 온상인 권위적인 지배체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실상 군주제적이고 귀족적인 통치는 고대세계의 일반적인 형태였다. 문명화의 정상적인 상태였으며, 소수가 정치와 경제를 주도하고, 이런 질서를 하느님의 질서로 선포해 왔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노예들의 하느님’이었다는 점에서, 이런 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셨던 분이었기 때문에, 유대의 예언자들은 야훼전통에 서서 변질된 예루살렘을 ‘불의의 중심지’이며 ‘하느님의 언약을 배신한 중심지’로 비판하였다.

8세기의 미카 예언자는 유다의 죄가 한 도시 ‘예루살렘’이라고 꼬집는다.

“올바른 것을 역겨워하고 올곧은 것마다 왜곡하는 야곱 집안의 우두머리들아 이스라엘 집안의 지도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피로 시온을, 불의로 예루살렘을 세운다.”(미카 3,9-10)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두고 “소돔의 지도자”요 “고모라의 백성들”이라고 비판하면서, 제사도 기도도 싫으니 먼저 악행을 멈추고 정의와 공정을 세우라고 촉구한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 충실하던 도성이 어쩌다 창녀가 되었는가? 공정이 가득하고 정의가 그 안에 깃들어 있었는데 이제는 살인자들만 가득하구나.”(이사 1,15-17, 21)

7세기말 6세기초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거리마다 쏘다니며 살펴보고 알아보아라. 한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는지 광장마다 찾아보아라. 올바르게 행동하고 진실을 찾는 이가 있어 내가 그곳을 용서할 수 있는지 알아보아라.”(5,1)면서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고 면박을 주고 있다. 예수의 성전정화 장면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헤롯궁 입구에서. 사진=한상봉

사라진 예루살렘의 꿈

그래도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여전히 “세계의 희망”이었고 “세계를 위한 하느님의 꿈”이었다.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이사 2,3) 그들은 여전히 평화가 세계가 오리라 기대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586년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해 예루살렘이 파괴되었고, 500년대 후반에 바빌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스룹바벨과 백성들은 솔로몬 성전에 비교할 수 없이 소박한 제2 성전을 재건하였다. 이어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의 식민지로 있다가, 기원전 164년경 마카베오 혁명이 성공하면서 하스모네 왕가가 들어서 기원전 63년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될 때까지 100여 년간 독립을 누렸다.

로마는 변방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지역협조자를 물색하면서, 이두메 사람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기원전 4년까지 통치하면서, 권력투쟁 과정에서 전통적인 유대 귀족가문의 사람들을 처형하고 토지와 부를 몰수하였다. 그는 신진 엘리트를 기용하였으며, 부하들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어떤 공공모임도 불신했다. 대제사장조차 헤롯 재위 33년 동안 7명의 제사장을 교체시켰다. 전형적인 독재정권이 헤롯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헤롯의 가장 방대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성전 리모델링이었으며, 헤롯궁 건설이었다. 헤롯은 농업도 광산자원도 없고 강도 없는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돈벌이 수단으로 주목했다. 성전외관은 흰 대리석으로 꾸미고 금을 입혀 장식했다. 그래서 성전은 불결한 세계를 비추는 정결함의 상징으로 찬란한 햇빛을 받으면 빛을 뿜었다. 웅장한 성전에 매료된 사람들은 성전 순례를 원했고, 헤롯은 성전에 기부금을 내도록 로마 전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격려했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400~800만명의 유대인이 살았으며, 전체 인구의 6~12%에 달했다. 성전세와 순례자들, 그리고 모든 유대인이 내야 하는 십일조로 예루살렘에 자본이 유입되었다.

예루살렘의 거주지는 크게 세 곳으로 나뉘는데, 동쪽으로 성전이 있고, 중앙에서 남쪽 골짜기까지 하부 도시, 서쪽에는 상부도시가 자리잡았다. 고지대에 있던 상부도시는 부유한 엘리트들이 사는 곳으로, 헤롯궁도 그곳에 있었다. 하부도시에는 가난한 빈민들이 살았는데, 수로가 두 개나 되는 상부도시와 달리 하부도시에는 스트루티온 못과 연결된 수로 하나 뿐이어서 늘 물 부족을 경험했다. 게다가 예루살렘의 쓰레기장인 힌놈계곡은 지옥을 뜻하는 ‘게헨나’라고 부를 정도로 더러웠다.

“이것이 예루살렘이다. 이쪽 산비탈에는 웅장한 성전이 있고 저쪽 산비탈에는 호화로운 궁전이 있는 곳, 그 사이에는 비좁은 거리와 좁아터진 집, 구멍가게와 오두막집, 초조하게 도살을 기다리는 동물들의 신음소리가 가득한 곳, 제의적 정결과 상상도 하기 싫은 오물이 공존하는 도시. 양지와 음지, 상부와 하부가 공존하는 도시.”(<가장 길었던 한 주>, 닉 페이지, 포이에마, 102쪽)

한편 헤롯은 지중해 연안에 전전후 항구를 지었는데, 황제였던 ‘율리우스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라고 이름 지었다. 이곳은 나중에 유대 총독이 머무는 로마의 지방 행정수도가 되었다. 여기에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는데, 사람들은 ‘짐승같은 헤롯’이라고 불렀다. 그는 방탕한 소비와 잔인한 압제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 유대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시리아에서 로마군대가 출동해서 소요를 진압했다. 나자렛에서 4마일 떨어진 세포리스가 불태워지고, 생존자는 노예로 팔았다.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서 로마군대는 수비대원 2천 명을 한꺼번에 십자가에 매달았다. 유대인들이 로마군대의 힘과 잔혹함을 직접 경험한 첫 사건이다.

유대전역을 다스리던 헤롯이 죽자, 로마는 유대왕국을 세 지역으로 나눠 그의 세 아들에게 맡겼다. 갈릴래아와 요단강 건너편 페레아는 헤롯 안티파스에게, 요단강 북동쪽 헤롯 필립에게, 유대와 사마리아는 헤롯 아르케라우스에게 맡겼다. 그러나 기원후 6년부터는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아르케라우스를 폐위시키고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이 다스리게 하였다.

결국 이 지역은 왕 없이 대제사장 등 성전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제 성전은 로마와 유대의 협력체제에서 중심이 되어 독실한 유대인들의 반감을 샀다. 최고 통치기구인 산헤드린(공회)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부유한 신진가문의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자리 잡았는데, 율법학자들은 주로 법률전문가, 기록관리인, 하급행정관으로 일했다.

성전관리인에 해당하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대지주였는데, 유대교 율법에 제사장의 토지소유를 금하고 있었지만, 율법학자들은 이를 “토지를 소유할 수 있지만 밭에서 일할 수는 없다”는 식으로 유권해석을 내렸다. 당시 산헤드린에 참여한 장로들은 전형적인 부재지주였다. 그들은 율법의 ‘토지매매금지’를 피해서, 왕에 의해 몰수된 땅을 하사받는 형식을 취하거나, 빚을 갚지 못할 때 토지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소유토지를 늘려갔다.

이들은 실질적 소유자들은 땅에 대한 ‘용도결정권’을 지녔는데, 소농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곡생산에서 특용작물 생산(무화과, 대추야자, 올리브 등)으로 전환하면서, 많은 농민들이 그 땅에서 소작조차 못하고 밀려났다. 소작농조차 되지 못한 농민들은 생계수단을 잃어버리고 일일노동자가 되거나 건설현장에서 일하거나 구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는 유대의 토착 지배세력을 길들이기 위해 빈번하게 대제사장을 교체하였는데, 총독 부임 이후 60년 동안 18명의 대제사장이 교체되었다. 이런 점에서 카야파는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18년부터 36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대제사장직을 유지하였다. 이런 자였기 때문에 “저자(예수)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8. 50)라고 말할 만하다.

유대인 거주지역과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에 가로놓인 장벽. 사진=한상봉

성전 비판세력의 등장: 에세네파와 열혈당, 그리고 세례자 요한

그래도 성전신학은 계속해서 성전을 하느님의 거처, 제사를 통해 하느님의 용서를 매개하는 곳, 기도의 중심지, 순례의 목적지로 보았으며, 성전세력은 이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예수시대에도 성전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나왔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성전과 제사장 제도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꿈란 등 그들의 공동체를 임시 성전이라고 부르며, 정화된 성전에서 자신들의 힘이 회복될 날을 고대하였다. 한편 성전세력이 로마와 협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혈당원’으로 알려진 유대인 반군들은 66년 폭동을 일으켰을 때,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제일 먼저 농민층 가운데서 대제사장을 제비뽑기로 임명했고, 성전에 쌓인 빚문서를 불태웠다.

세례자 요한은 요단강가에서 ‘값없이’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런 행위는 성전만이 하느님의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개념을 깨뜨리고, 성전만이 하느님과 당신 백성들의 중재자임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요한처럼 예수도 성전의 제사와 관계없는 용서를 선포했다. 알다시피 복음서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예수가 제사 등 경신례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성전 밖 어느 곳에서도 하느님을 예배할 수 있으리라 전했다.

물론 예수는 예루살렘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모두 감지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예언자들처럼 예루살렘 때문에 울었으며, 예루살렘의 불의 때문에 비판하였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2-44)

예수의 이 발언은 70년에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뜰 서쪽 벽 일부만 남기고 헐어버린 사실을 상기시킨다.

예수는 ‘자신’을 선포하지 않았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의 설교에서 중심은 “예수 자신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었다. 메시야 예수, 하느님의 어린 양 예수,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아니었다. 물론 마르코 복음은 서두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1)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예수가 주장하고 가르친 것이 아니고, 생전에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발설한 것도 아니다.

예수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구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례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라는 음성이 들렸으나 예수만 들었다. 더러운 영들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 질렀지만 이 말 역시 예수에게만 들리지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제자들은 듣지 못했다. 결국 이런 선언은 공적으로 선포된 것이 아니라 사적으로 주장된 것이다.

심지어 예수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질문하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신앙고백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8,30)

마르코 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냐?”고 묻자,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15,2)고 즉답을 피했다. 루카복음에서는, 최고의회에 끌려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냐?”고 묻자, 예수는 역시 즉답을 피하고 “내가 그러하다고 너희가 말하고 있다”(22,70)면서 침묵을 지켰다. 결국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는 자신을 선포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사진=한상봉

농민들에게 선포된 하느님 나라

취임연설 같은 예수 생애의 첫 번째 말씀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였다. 예수는 하느님의 백성이나 가족, 공동체라 하지 않고 하느님‘나라’라고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통치”를 뜻하는 정치적 용어였다. 그리고 “회개하라”는 말 역시 “죄를 뉘우친다”는 후대 그리스도교적 의미와 달리, 히브리 성경에서는 “돌아오다”라는 뜻이다. “믿는다”는 말도 교리에 대한 수락이 아니라 “신뢰”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소식을 신뢰하고 그 나라에 충성하라”는 뜻이다.

이 메시지는 가장 먼저 ‘농민’들에게 선포된 것이다. 도시에는 부자들과 권력자들, 그리고 그들의 하인들과 부유층에 봉사하는 상인들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도시에 가지 않았다. 갈릴래아에도 인근에 세포리스와 티베리아스가 있었지만, 예수는 시골이나 가파르나움 같은 작은 마을에서 설교하였다. 결국 예수의 메시지는 주로 농민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성지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주로 다루었던 주제는 ‘제자됨’에 대한 것이었다. 제자는 무릇 예수를 따라야 하는데, 그 길의 끝에는 예루살렘이 있다. 예루살렘은 권세있는 자들과 대결하는 장소이며, 결국 죽음과 부활의 장소였다. 예수는 수난 예고 이후에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8,34-35)

십자가, 오직 제국만이 십자가 형벌을 가했으며, 제국의 권위를 부정하는 죄에 대해서만 그렇게 처형했다. 오늘날 우리가 질병이나 개인적 고통을 당할 때 ‘내게 주어진 십자가’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오히려 그 십자가는 “제국의 보복을 각오하고 모험에 나서는 것”을 뜻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처형될 것이라는 두 번째 예고가 있고서도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자인지” 길에서 다투었다. 이때 예수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9,35)고 말한다. 세 번째 예고가 있은 뒤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장차 올 나라에서 요직을 맡게 해달라고 다툰다. 이때에 예수는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고 묻는다.

여기서 ‘잔’과 ‘세례’는 죽음의 상징이다.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죽음의 ‘잔’을 거두어달라고 하느님께 간구했고, 세례는 죄 많은 과거를 죽이는 상징적 의례이다. 예수는 거듭거듭 제자의 길을 ‘제 목숨마저 바칠 정도로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종의 길’이라고 전한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10,42-45)

결국 예수가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유는 단순히 ‘성전정화’의 의미가 아니었다. 대제사장에 대한 반발도 아니었다. 유대교에 대한 부정도 아니었다. 예수의 목소리는 1세기의 다양한 유대인들의 목소리 가운데 하나였고, 하느님을 향한 충성심이 드러난 결정적인 목소리였다. 그것은 하느님을 빙자해서 권력과 탐욕을 채우는 지배체제를 고발하고, ‘나눔과 섬김’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성지주일에 성지가지를 축성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 우리는 과연 가야파처럼 빌라도의 행렬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남루한 실패자의 운명을 타고난 예수의 행렬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 길은 고난하고 아득하기만 하지만. 예수의 길은 지금도 늘 실패만 거듭하고 있지만.

“도시 반대편에는 부유함과 상부도시의 특권을 독점하려는 로마의 전쟁기계가 있었다. 하지만 동쪽에는 초라한 누더기 같은 평화의 왕이 있었다. 이것이 이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건의 진수이다. 당신은 어떤 왕을 택할 것인가? 로마의 압제인가 하느님 나라의 통치인가?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는가?”(닉 페이지, 108쪽)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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