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교님 왜 저러지?”보다 중요한…신비와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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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교님 왜 저러지?”보다 중요한…신비와 예언
  • 한상봉
  • 승인 2017.02.15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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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요즘은 줄여서 ‘박순실게이트’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동안 드러난 정황으로 봐서 그들은 국정농단 사태의 ‘공범’을 넘어서 사실상 ‘한 몸’이 되어 움직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빙의가 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두 인격의 합체가 역겨운 것은 그 행실과 의도가 추악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사유화를 넘어서 민중에 대한 멸시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하느님의 모상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박순실’을 찬양하는 ‘태극기’ 집회는 모국의 언어와 상징을 모욕하지만, 저항하는 광장의 촛불은 아름답다. 그 찬바람 속에 사제도 있고, 수도자도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는 모습은 눈물겹다.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하느님을 선택하기로 작심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촛불마냥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눈물 자욱한 세상에 내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누군가 “그러면 교회 지도자들은?”이라고 묻는 것은 좀 생뚱맞은 질문이 될까? 광장의 그 사람들이 곧 ‘교회’일 테지만, 그래도 백성을 돌봐야 하는 예언적 직무에 충실한 교도권이 나서 준다면, 그 백성들이 얼마나 환호작약하며 뜨거운 기쁨으로 거리로 나설 것인지 가늠하는 것이다.

 ‘권력 없이’ 예언자가 되거나 신비가가 되거나

헨리 나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신비가가 되거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교도권이 어차피 현실 속에서 종교-정치적 권력에 갈음한다면, 중요한 것은 하급 사제들과 수도자와 신자들이 ‘권력 없이’ 예언자가 되거나 신비가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말 그대로 ‘가톨릭 일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느님과 깊이 만나는 ‘신비’의 문이 세상을 깊이 만나는 ‘예언’의 문과 마주쳐 소리를 내는 ‘일꾼’이 필요하다. 당장의 문제가 해결되고 광장에서 촛불이 철수하는 날이 오더라도, 하느님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가슴속에 ‘세상을 밝히는 촛불 하나’ 담아 두고 사는 사람들이 ‘가톨릭 일꾼’이다.

최근에 크리스티안 펠트만이 지은 <빙엔의 힐데가르트>(분도출판사, 2017)를 읽으면서 놀라고 가슴 뜨거워졌다. 12세기, 여든 살의 수녀원장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는 프리드리히 1세 황제의 양심을 향해 이렇게 고언했다. “올바른 통치를 위해 왕홀을 당신 손에 어떻게 쥐고 있어야 하는지 당신 눈이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임금님께서 당신을 땅바닥에 내치시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녀는 광장에서 군중들에게 설교했으며, 성직자들의 권력욕과 탐욕에 격렬히 항의했다. 쾰른 대주교를 “탐욕스러운 매”라고 불렀으며, 그의 사제들을 공공연히 힐난했다. 

“당신들은 어둠을 발산하는 밤이며, 일하지 않고 나태하여 빛 안에서 살지 않는 백성처럼.... 교회의 발판이 되지 못합니다. ... 그리고 당신들의 역겨운 부와 인색함과 많은 헛된 짓 때문에, 당신들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온 힘을 다해 생명을 보살펴라!”고 말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직무다. 죽임의 세력에 맞서 싸우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 그것이 힐데가르트의 사명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힐데가르트를 신비가 이전에 ‘예언자’라고 부른다. 당시 사람들은 힐데가르트를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드보라’에 견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환시를 통해 본 것을 이사야,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바라보았다.

사목자들이 ‘복음적 열정’을 지니지 못하는 이유

신비가는 자기 속마음을 들여다보며 깊디깊은 내면에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사목자들이 ‘복음적 열정’을 지니지 못하는 이유를 “그분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복음의 기쁨>에서 말했다. 신비가들은 에로틱한 하느님과의 연애를 상기시키며,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 빚어지는 “포착할 수 없는 숨결”을 사랑한다. 그분을 만나면 그분 바깥에 머물 수 없고, 그래서 그분에게 함몰된다.

예언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하느님과 만난 고유한 개인이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예언자는 이제 자신의 신앙고백이나 생각을 선포하지 않고 하느님이 자신에게 의탁하신 메시지를 고스란히 전한다. 악기의 현이 연주자의 손에 장악된 것처럼, 예언자는 자신의 개성을 철수시키고 하느님의 대변자, 그분의 통역자이며 확성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직업적 종교인의 태도에서 자주 발견되는 어떠한 종교적-정치적 책략도 끼어들 틈이 없다. 그분만이 투명하게 선포된다.

크리스티안 펠트만은 "빙엔의 힐데가르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비가와 예언자의 공통점은 신학적 이론을 논하지 않고 종교적 체험을 전하며, 또 거기로 초대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교회에 필수 불가결하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믿어야만 하는 관념과 명제들의 체계가 아니라 신앙의 체험이거니와, 이 체험이 메시지가 되고 또 체험 가능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제공된다.”

짜맞추어진 논리적 신학적 틀을 거부하는 이들 신비가와 예언자들은 마찬가지로 짜맞추어진 세상의 질서에 도전한다. 하느님은 ‘늘 새로운 미래’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교회의 제도적 틀과 교리마저 상대화하기 때문에, 고착화된 교회는 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직 아니”를 주장하기 때문에 권위적 교회에게 불편하고 성가신 존재들이다. 이들은 늘 다시 ‘노예 해방의 종교’를 설파한 예수에 대한 ‘위험한 기억’을 깨워 일으키기 때문에 당장 ‘구속영장’이라도 제시해야 할 판이다.

가톨릭일꾼 양성이 시급하다

정리하자면, 가톨릭 일꾼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신비가이며 예언자들이다. 늘 새롭게 복음을 읽고 일상과 현장에서 적용하는 사람들이다. ‘나’ 없이 하느님을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그 입에 “불같은 하느님 말씀”이 담겨 있는 사람들이다. 그 손끝에서 성서가 새롭게 쓰이고, 성령이 자유롭게 활보하는 영혼이다. 이런 사람을 발견하고 양성하고 지지하고 따라 걷는 교회가 참된 제자들의 교회다.

이런 가톨릭 일꾼 양성을 위해 활동하는 매체가 한국 교회 안에도 있다. 편의상 몇 가지만 거론하자면, 교회와 세상의 갈피를 들추어 진상을 알리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있다. 교회와 세상의 심층을 분석하고 들여다보고 성찰케 하는 우리신학연구소의 <가톨릭평론>이 있다. 가톨릭운동의 영적 토대를 점검하고 교육하는 <가톨릭일꾼>이 있다. 이들 매체들은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성사인 교회의 방패며 무기다. 놓치고 버릴 게 없다. 늘 새로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이 매체들을 성심으로 동반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들 매체들의 공통점은 ‘평신도 주도’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어느 매체고 할 것 없이 모두 의미 있지만 늘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도 고백하고 싶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시급한 사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사실상 가장 긴요한 것은 “준비된 평신도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모였다 흩어지는 사람은 많겠지만, 가는 곳 어디서든 복음적 열정과 신학적 소양, 교회라는 자의식으로 무장된 일꾼들을 양성하는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등잔에 기름을 충분히 붓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처럼, 그분이 불러 세울 때 언제든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는 일꾼들을 간절히 기다린다. 세상에 추수할 것은 많으나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일꾼이 부족하다.


[기사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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