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인간의 서비스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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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인간의 서비스가 필요 없다
  • 참사람되어
  • 승인 2017.02.1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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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되어-8

예수는 종교적 경신(敬神)행위를 하지 않았다 

예수는 스스로 종교적 경신행위들로부터 자유로웠으며, 또한 제자들의 경신행위에 대해서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예수는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경배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예수는 종교적 의식(儀式)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었고, 그의 제자들도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예수가 예배의식을 행하였다는 사실은 복음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성전에 갔을 때도, 그는 말씀을 선포하고 장사꾼들을 내쫓았을 뿐이다. 그가 성전에 간 것은 희생제사를 바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성스런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음송(吟誦)기도를 바치기 위함도 아니었다.

예수는 자신의 소위, 활동무대로서 성전을 이용하였다. 성전은 군중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예수에게 있어서 성전은 파괴될 수 있는 것이었다(마르13:2). 왜냐하면 성전은 새로운 계약의 성취를 위해 아무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옵니다... 과연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될 때가 오고 있으니 바로 지금입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예배하는 이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요한 21-23)

예수는 희생제사를 봉헌하지 않았고,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관례적인 신앙행위를 하도록 독려하지도 않았다. 그는 제자들이 성전에서 행해지는 예배의식에 참여하도록 유도하지 않았다. 그는 회당을 규칙적으로 찾지도 않았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회당에 간 것은 당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지 경건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는 전혀 종교적인 분이 아니었다. 사도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바리사이들의 신앙행위를 책망하면서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본받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기도 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시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나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마태 6:5).”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겉꾸며 길게 기도한다(마르12:40).”

예수가 종종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서 예수가 어떤 경신행위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복음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는 자신을 숭배하는 어떤 의식도 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내지도 않았다. 예수는 성찬례를 제정했다. 그러나 성찬례가 경신행위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예수가 행한 만찬은 한 공동체 구성원간의 결속의 상징이었다. 그 상징적 의미는 새로운 이스라엘 건설을 위한 새로운 계약의 체결과 연관되어 있다. 거기서 우리는 어떤 경신 예배적 요소도 발견할 수 없다.

아주 후대에 이르러 그리스도교인들은 성체성사를 하나의 경신 예배의식으로 총합시켰다. 그러나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결코 예수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며, 예수가 그렇게 되기를 바랬을 것이라는 어떠한 암시도 찾을 수 없다. 성체성사는 후에 지중해 문화권과 접목되면서 하나의 경신예식으로서 바뀌게 되었다. 본래 예수가 세운 성만찬 자체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께 향한 행위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새로운 의례로서의 어떠한 요소도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기도는 은밀하고 사적인 행위로서 이루어지길 바랬다

예수는 기도했다. 그러나 특별한 의식을 갖추지 않고 기도했다. 그가 기도할 때는 홀로 있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특별한 모델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이른 새벽 몹시 어두울 때에 예수께서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외딴 곳으로 물러가서는 거기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또 어떤 때는 예수는 군중으로부터 피해 “기도하려고 산으로 올라 가셨다(마르 1:35).”

거기서 예수는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사도들이 기도에 대해 알고자 했을 때, 그들은 세자 요한의 경우를 염두에 두었다. 그들은 예수가 도대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이윽고 한 제자가 예수에게 말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루까 11:1).” 제자들의 청원이 있고 나서야 예수가 <주님의기도>를 가르쳐주게 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기도의 문제에 과해서 예수는 신중하였으며, 기도는 은밀하고 사적인 행위로서 이루어지길 바랬다. 예수는 제자들과 기도에 새해 서로 말하기를 꺼려했다. 모처럼 예수가 기도에 대해 언급할 때조차도 대부분 부정적인 투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는 이방인들처럼 수다를 떨지 마시오, 그들은 많은 말을 해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닮지 마시오(마태 6:7-8).” “당신이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하시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당신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 6:6).”

예수의 경우, 기도는 언제나 은밀한 곳과 결부되어 있다. 기도를 하는 방식이나 또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야하는지, 어떤 장소에서 해야하는지는 자유다. 이런 기도는 전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며, 의식이 아니고 밖으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기도는 예배의식이 아니라, 친밀한 대화이다.

중요한 것은 영적 예배...치유하고 가르치고

복음서는 예수가 “종교적”이 아니라, 오히려 예절이나 의식, 틀로 짜여진 신앙관습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말이 곧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여러 의식적 신앙행위의 부당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러한 신앙행위의 근거가 되는 모델을 예수에게서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관찰들은 예수에 의해 시작된 “종교”인 그리스도교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심장하다. 후대에 이르러 교회는 하나의 풍성한 전례 의식을 보태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례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삶이 지니고 있는 것만큼의 계시적 가치는 없다.

하느님과 예수와의 관계는 어떤 전례적이거나 제사적인 것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하느님이 예수에게 바라는 유일한 제사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특별한 사명의 실천이다. 복음선포를 위해 끊임없이 여행하면서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고, 군중들과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것은 사도 바오로가 말했듯이 이른바 “영적 예배”(로마 12:1)인 것이다.

친밀감 있는 표현 "아빠" 하느님

예수는 하느님을 종종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구약성서에도 나타나 있으며, 예수 시대에 흔히 사용되던 말이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예수가 창안한 것이 아니다. 다만 새로운 것은 예수가 이 말을 특별히 자주 강조하여 사용했다는 점이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이런 식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예수의 “아빠”라는 표현은 다분히 정감(情感)이 넘치는 새로운 것이었다. 거기에는 의례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예수는 아주 단순하고 친밀감 있게 하느님을 말한다. 그는 하느님의 본성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은 어떠한 분이며, 그의 속성들은 무엇인가 등등의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다. 복음서는 하느님의 본질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예수가 선포하고자 했던 주 관심사는 하느님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과 인류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하느님은 항상 현존하신다. 그러나 항상 보이지 않게 감추어 계신다.

“일찌기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품안에 계시는 외아들,
하느님이신 그분이 알려 주셨다” (요한 1:18)

“필립보가 예수께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흡족하겠습니다’하고 여쭈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필립보, 이렇게 오랫동안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었는데 당신은 나를 모른다는 말입니까?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우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합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당신은 믿지 않습니까?”(요한 14:8-10)

예수의 이 말은 자신이 하느님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의 신성(神性)은 그의 깊은 인간성 속에 깃들어 있다. 그의 모습에는 도무지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은 확실하게 당신께로 다가서는 유일한 길을 보여 주신다. 예수의 메시지는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알고자 원할 때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아는 데 있다.

복음서는 하느님에 관한 관념적인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예수가 자신과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예수는 거의 언제나 “나를 보내신 아버지”(요한 5:23,37) 혹은 단순히 “나를 보내신 분” (요한 5:24,30; 6:38)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왔고 그에게서 파견되었다. “나는 그분으로부터 왔고 또 나를 파견하신 분이 바로 그분입니다”(요한 7:29)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이를 여러분이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느님의 일입니다”(요한 29)

예수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앎은 그의 파견 사명과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 예수와 하느님의 관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예수의 모범을 따라야만 한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관념적인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삶과 동참하기를 시작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을 안다.

예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보여 주셨다. 그것은 "주여, 주여!" 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쫓아 사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항상 당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들이 세상을 위한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기를 원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주신 복음선포의 사명을 완수하기를 바라신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마태 7:21).”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맏이한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그는 ‘싫습니다’하고 대답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갔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아들한테 가서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 주인 어른’하고 대답했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했겠습니까?” 그들은 ‘맏이 입니다’라고 말했다(마태 21:28-31).“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함이 중요한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서비스 받으려 하지 않으신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여타의 종교들과 다르다. 예수는 감추어 계신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 하느님은 외적인 의식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인간을 위한 봉사에 헌신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두신다. 예수는 “봉사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봉사하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태 20:28).” 하느님은 당신을 향한 인간의 복종적인 충성이나 환호 소리나 박수 갈채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사람들에게 오직 한가지 원하시는 것은 인간에게 봉사하라는 당신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일 뿐이다.

우리는 경신의식(敬神儀式)에 헌신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느님은 인간의 서비스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참다운 순종은 인간이 모든 힘을 다해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삶을 끊임없이 창조해 나가는 데 있다.

예수는 하느님께 순종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그의 순종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침으로써가 아니라, 갈릴래아의 길가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기적을 행하고, 아버지를 증거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우리는 교회가 역사를 통해서 외부 문화로부터 수용하거나 조직화한 전례의식이나 종교적 체험들의 가치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삶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교회는 제도가 아니다. 비록 성격상 그러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교회의 정체성과 정당성은 그가 받은 사명에 있다. 즉 세상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 뜻과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 만일 교회가 하나의 제도로서만 남는다면, 그것은 바리사이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되고 만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소유물로 만들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법전이나 관습, 신앙형식들과 동일시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재산처럼 자신들의 소유물로 만들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하느님의 소리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소리였다.

“당신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결코 들어본 적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습니다. 또 당신들은 그분의 말씀이 당신들 안에 머물러 있게 하지도 않습니다(요한 5:37).”

하느님께 대한 참된 봉사는 교회를 확장시키고 공고히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자체가 그리스도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나라를 자신의 제도 안에 가두어 놓고 있는 잘못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미 전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저 앵무새처럼 되뇌일 뿐 끊임없이 귀기울이고 알아듣기를 그친다면, 우리는 끝내 하느님을 알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다. 

- 호세 콤블린의 “나자렛 예수” 중에서

출저/<참사람되어> 199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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