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단맛은 껍질 안에 있다, 말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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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단맛은 껍질 안에 있다, 말씀처럼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2.1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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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8
사진출처=catholic.org

다음은 2월 2일 복된 성모마리아의 정화 축일에 리보의 알레드가 했던 강론의 시작 말들이다:

형제여,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먹기 위하여
당신들이 모이는 것을 나는 압니다.[요한 6,27참조]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줍니다[요한 6,33].
당신은 이 빵을 마치 주 예수의 아이들처럼 청합니다.
여기에 와서 당신은 먹게 되기를 기대하며,
특히 배를 채우기 보다 마음을 채우는 빵을 먹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길에서 쓰러지지 않도록[마태오 15,32참조].
주님께서 그가 당신들을 위하여 빵을 쪼개는 사람이 되도록 허락하시기를
그렇게 해서 당신들에 대해 세상이 말할 수 없게 되기를:
어린것들은 먹을 것을 찾는데 주는 이가 없다고[애가 4,4].

같은 강론의 후반부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 안에 있는 순례의 빵’에 관해 말하면서 그것을 사로잡힌 기쁨이라고 묘사한다. 이 기쁨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기쁨이라고 고린토전서 2,9절을 인용하여 말한다.

‘기쁨에 사로잡힘’이란 작은 구절은 신선함, 더욱이 흥분 같은 감각을 포착한 것인데, 그것은 내가 오늘날 읽는 대부분의 신학과 전혀 같지 않은 시토 수도회 교부들에 관한 독서에서 발견한 것이다.

머리보다 배, 지성보다 인격에 호소하는 신학 

성 베르나르드 산 수도원의 힐라리 코스텔로는 상징적 신학이 머리보다 배에 충격을 주고, 지성뿐만 아니라 전 인격, 느낌, 기분에 호소하기 때문에, 아마 가장 강력한 유형의 신학이라고 말하였다. 문제는 우리가 과거에 당연시됐던 그 모든 상징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리는 동안, 지금의 많은 상징은 평범하거나 약해졌지만(특히 광고에서의 상징의 사용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신학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자신들의 시적이고 예술적인 면을 다시 주장하는 갈증과 같은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훨씬 더 깊은 기도, 즉 시토 수도자들이 말을 사용하는 방법에 의해서 시와 노래의 특성을 갖게 된 기도 속으로 인도됨을 발견한다. 호이랜드의 길버트는 속이 껍데기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였다:

단맛은 속 안에 들어 있다,
껍질에서 보이는 게 아무리 많더라도!
신비들은 숨겨져 있어 애를 써야 찾아진다.
그러나 말씀의 매력은 표면에 있다.
말씀은 무상으로 주어져,
노력 없이 순수한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이제 우리는 멜로디를 무시하는 것만큼
신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씀들은 노래이고
토론하기보다 불러지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며,
노래로 불러질 때에
말씀들은 그 이상 더 분명하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토 수도자들은 속의 고기, 예표적인 의미를 얻기 위하여 껍질을 떠나고 싶어할 만큼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드가 아가서에 대해 말한 대로, ‘문자의 외피 밑에 놓여 있는 영적 열매를 끌어내도록 노력하자.’ ‘나는 이 영감이 풍부한 말들의 심연 속에 숨겨진 영과 생명의 보물을 찾을 것이다.’

말의 밑에 숨겨진 신비들은 침묵 속에서 시간을 갖고 파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의미의 숨겨진 층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르드의 요한은 성서를 덤불이 있는 나무라고 불렀다. 그는 그곳에서 신비들이 발견될 수 있으며, 그 신비들이 가까이 잡거나 혹은 멀리 잡거나 함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거울과 같다고 익숙한 중세의 비유로 말했다. 의미에는 다양한 차원들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더 내적인 차원으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그가 사용했던 비유는 포도주 저장실이었다:

"지혜의 말씀들은 부자의 포도주 저장실처럼, 의미가 풍요롭다... 더 탁월하게 이해하고 더 많이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더 부드러운 술과 더 강한 술이 있다. 친구들을 위하여 섞는 포도주가 있고 그렇게하여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주고, 가족을 위해 짜내는 술이 있으며, 술에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잘 조절하여 내놓기도 한다."

예수는 말씀의 정원사

베르나르드는 이 내적 여정을 위하여 훨씬 더 복잡한 지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일련의 자리들을 주는데, 이 각각의 자리는 개인적으로 틀림없이 적합해야 할 독서의 단계들을 나타내고 있다. ‘정원이 평범하고 단순한 역사감각을 지니게 하자, 도덕적 감각의 포도주 저장실, 환상적인 관상의 신비가 있는 신부의 방이 되도록 하자.’ 그는 이것을 세밀하게 만들어 가는데, 그 모든 것은 우리가 포도주저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양념냄새, 향료의 느낌과 포도주의 맛을 따라 움직이며 아주 복잡하게 되어 간다.

이그니의 게릭은 훨씬 더 온화하고 단순하다. ‘시편송가로 헌신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는 강론에서 그는 형제들에게 말했다. 

"형제들은 책을 읽을 때에는 힘껏 많은 정원들을 산책하고, 의미를 모을 때에는 힘껏 많은 사과를 따고. 그리고 복된 사람들은 새 사과와 오래된 사과들을 저장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즉, 예언자들, 복음사가와 사도들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으로써 신부에 대한 신랑의 확신-‘새 사과와 오래된 사과 모두를 나는 내가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간직합니다-은 여러분 각자에게 건내는 말과 같다."

이 강론의 후반부에서 그는 예수를 말씀의 정원사로 보았는데, 나는 그것을 기도의 형식으로 바꾸었다:

오 주 예수여,
참된 정원사여,
우리 안에서 당신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을 하십시오,
당신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과연 참다운 정원사이시기 때문에,
동시에 당신 정원의 제작자요 경작자요 지키는 분이시기에
말씀을 심으시고,
영으로 물을 주시며
당신의 힘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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