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가 소수를 존중하고 소수가 다수를 수긍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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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가 소수를 존중하고 소수가 다수를 수긍할 때
  • 김경집
  • 승인 2017.02.1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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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집단에서 어떤 의사 결정을 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다수결원리다. 시민 주권의 원리, 자치의 원리, 권력 분립의 원리와 함께 민주주의의 가장 대표적이고 기본적인 원리다. 그러나 이 때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다수결원리가 유일한 또는 유력한 대안일 경우 그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구성원들의 자유의사를 완전하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하며 모든 정보는 공개되어야 한다. 또한 모든 개인의 의견은 평등하다는 전제가 확고해야 한다. 모든 개인은 동등한 인격과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개인의 의견은 여전히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다수결원리에는 물론 패자가 승복하는 원칙이 필요하다. 그 의연함이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다수자가 소수자를 설득하는 노력까지 무시되는 것은 폭력이다. 그렇게 되면 다수결 원칙은 다수의 횡포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보다 많은 사람이 승복할 수 있는 합리적 절차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다수결의 원칙이 양심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다수결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유일한 것은 인간의 양심이다. 간디는 “양심에서 다수결의 원칙은 설 자리가 없다.”고 갈파했다. 다수결의 원칙은 각 의견의 상대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가치에 대한 한 개인 혹은 다수를 차지하는 집단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는 없다. 다수결은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상대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은 명심할 일이다.

다수결의 원칙에 의한 선택과 결정에서 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결정 이후 그 결정에서 배제된, 혹은 그 결정을 선택하지 않은 소수에 대해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결정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 결정의 합리성을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그들을 자신의 선택으로 수렴시켜 보다 합리적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수결에 따른 선택 이후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소수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와 타협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pixabay.com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선택된 결정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다른 선택의 내용이나 지지자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다수결에 따른 선택 이후에 그런 유혹에 빠진다. 예를 들어 51%의 득표로 집권한 세력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며 자신들의 선택과 결정이 대중의 지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당연한 것이 여기면서 49%의 지지자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며 자신들의 결정만을 강요하는 경우이다. 그 순간 다수의 횡포가 발생한다.

그것은 올바른 소수를 배제하고 다수의 결정은 언제나 옳다고 단정한다. 그들에게 반대의 의견이나 비판은 합리성에 대한 의심으로 여겨질 뿐이고 무조건적인 반대 혹은 반대를 위한 반대로만 느껴진다.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소수의 주장이 자유로이 표명될 수 없다면 차라리 다수결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

소수자, 약자의 처지에 놓인 사람들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은 곳에서는 다수결의 원칙의 가치가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단일민족국가 이데올로기가 강한 곳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한국사회의 경우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반공지상주의가 그렇고 배달민족이니 백의민족이니 하는 이념이 그렇다. 그래서 21세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매카시즘이 난무한다. 단일민족에 대한 왜곡된 환상은 획일적 수용을 강요하기 쉽다.

누가 소수자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소수자라고 부를 때 그것은 단순히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정의하는 것만은 아니다. 신체상, 그리고 문화적 다름 때문에 다른 이들 특히 다수와 구별되고 그것 때문에 차별을 받는 집단적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우리가 소수집단이라고 부르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소수와 다수의 개념 자체가 상대적이다. 따라서 소수자 집단이 있다는 건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와 힘을 누리는 우세한 무리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수자 집단을 단순히 수로만 파악하는 것은 좁은 생각이다. 예를 들어 겨우 몇 백만의 인구를 가진 유럽의 작은 나라 네덜란드가 그보다 몇 십 배 인구를 가진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를 식민통치했을 때 소수자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니고 인도네시아 사람들이다.

따라서 한자어 그대로 ‘수가 적은 사람(少數者)’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릇된 것이다. ‘소수’는 단순히 많고 적음의 양의 개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소수자란 다수가 갖는 지배적인 위치가 아닌 소수가 갖는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말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는 그 사회가 소수자와 권익에 대해 어떠한 기준을 마련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한 국가 또는 사회 내에서 소수의 집단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의 대상이어야 한다. 인종, 종교, 언어 등에서 다수와 구별될 뿐 아니라 불편을 겪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은 반인간적인 일이다. 그래서 국제인권조약 B규약 27에는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조약’이 포함되고 소수자의 문화, 종교, 언어에 대한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경제에서의 소수자는 노동자들이다. 자본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제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자본의 힘에 의해 좌우되고 결정되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식회사에서 권한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주식의 수’에 의해 결정된다. 기업가의 수보다 노동자의 수가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소수인 것은 그들에게 의사결정권이나 경영의 참여가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이나 어민들도 소수자이다. 최근 양산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대표적인 소수자들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는 기본적으로 다수자인 자본가와 대비되어 소수자이며 노동운동은 그러한 소수자운동에서 시작되었다지만 노동자 조직이 제도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도달하게 되면, 이미 다수자가 되어 버린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등 새로운 소수자의 집합을 만들어낸다. 기업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농어민을 위해 농협과 수협 등이 만들어지는 건 소수자들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신장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다. 하지만 여전히 소수자를 위한 제도나 정책은 미흡하다.

예수가 만난 사람들...대부분 소수자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소수자는 그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누가 지배적인 힘을 가지냐에 따라 사회적 약자, 즉 소수자가 된다. 소수자가 사회에서 겪는 불편과 차별을 걷어내는 것은 언제든 나도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연대에서 가능해진다. ‘여성할당제’나 ‘장애인 고용 할당제’ 등은 바로 그러한 점을 법적으로 보장해서 차별과 억압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사회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소수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사회적 비용을 과다하게 만드는 경우도 없지 않다. 노조의 지나친 요구와 대결도 그런 경우에 해당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들이 받았던 차별과 억압, 그리고 불이익의 역사성을 고려하면서 어느 정도 관용적일 필요도 있다. 다수가 늘 옳고 정당하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 현대는 이미 다원화된 사회이다. 다원적 사회 체계 하에서 지배세력 혹은 다수자는 소수집단의 존재를 허용한다. 또한 그 소수자집단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개방적인 열린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지금 교회가, 성직자들이 얼마나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고, 강자의 폭력성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복음서에 나오는 거의 모든 조역들, 즉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이 바로 소수자들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 11)

이른바 황금률은 바로 강자 혹은 다수자가 소수자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복음정신의 핵심이다. 그건 일차적으로 강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약자와 소수자가 무시되고 억압되는데도 외면하는 교회는 존재 가치 자체가 없다. 복음을 외면하는 교회와 성직자 그리고 신자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시대는 소수자의 시대가 되고 있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의 이 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다수가 소수를 존중하고 소수가 다수를 수긍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가치는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원성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미래는 다양성과 다원성이 끊임없이 교환하고 소통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회여야 한다. 그런 가치를 견고하게 가르칠 수 있어야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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