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없는 쌀은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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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없는 쌀은 어둡다
  • 참사람되어
  • 승인 2017.02.06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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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되어-7

하느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창세기 2,16) 하셨습니다. 그대로 따 먹으라 하셨으니, 혹시 가공을 반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가공 때문에 비옥한 땅이 마련한 영양에 가득찬 먹거리가 굉장히 약해집니다. 약해질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을 괴롭히기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벼 한알은 다른 곡식과 마찬가지로 똘똘한 눈, 세겹의 껍질, 그리고 전분이나 녹말 비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알눈은 뿌리를 내 보낼때까지 전분을 먹습니다. 눈과 겨는 사람의 필수적인 효소, 비타민과 광물들 즉 철, 코발트, 구리 ,망간, 몰리브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핵심속에 자연은 완전하게 모든 형의 비타민B를 담고 있습니다. 온 자연의 분포를 비교해볼때 이것은 놀랍고도 드문일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쌀을 먹을때 그 낟알을 먹어야 영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사람들이 벼를 맷돌로 방아할 때 제일 밖에 있는 겨만을 벗기고 그대로 쌀을 찧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이 마련하신대로 영양에 가득찬 주식을 먹었습니다. 더 이상 방아하면 알속에 있는 껍질과 무엇보다도 눈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맛이 있다거나 하얘서 보기 좋다해도 함수탄소만 먹게 되는 것입니다. 녹말은 그것 뿐입니다. 우리는 똑똑한 줄 알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즉 눈이 없는 쌀은 어둡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림=ade-bethune

밀도 마찬가지 입니다. 원래는 알 전체가 가루로 타개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방아기계가 18세기에 불란서에서 발명되는 바람에 소위 하얀 빵을 먹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자들만 하얀 빵을 살수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없는 사람들이 이 소위 부드럽고 맛이 있는 빵을 먹으려고 했습니다. 겉으로라도 부자들을 본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래도 쌀과 마찬가지로 하얀 빵은 여전히 녹말뿐인 것입니다.

겨와 인을 버리면 남은 가루는 오래동안 보관할 수 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서 방앗간의 주인은 더 많은 이익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이처럼 기계화는 분명히 자본주의의 필수품이 되는 것입니다.

소위 비옥한 하얀 빵은 녹말 뿐인데 너무나 영양물이 없어서 균들 마저 안 먹으려고 합니다. 또 빵을 싱싱하게 하기 위하여 큰 빵집에서는 빵을 굽기전에 가루에 염소의 이산화물을 부가하면서 그나마 녹말에 남은 비타민E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하지만 이 염소의 이산화물은 녹말을 부풀게 하죠. 이것은 주인의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토실 토실 여문 밀을 먹게 해주셨다.” 이 토실 토실 여문 밀이란 히브리 말에 신장을 가진 밀을 말하는 것인데, 눈과 겨를 가진 밀 즉 통밀이란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에게 “소금이 되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쓰는 소금과 또 소금 비슷한 미원은 아주 독한 것입니다. 바다의 소금은 여러 광물을 균형있게 포함하는데 가공하는 과정에서 순 염화나트륨만 빼놓고 다른 광물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남은 순 염화나트륨은 인간의 심장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또한 습기가 없도록 맨소금을 말리는데 이 과정 때문에 사람의 몸은 피해를 보는 것입니다다. 예수님이 오늘 나타나셨으면 아마도 “소금이 되지 말아라”하고 그 말씀을 바꾸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설탕도 생각해 봅시다. 맨 설탕은 갈색이고 달기는 하지만 자연스럽기 때문에 몸에 영양을 주는 것입니다. 17세기에 유럽의 기업주들이 사탕무우를 정련하기 위한 기계를 발명했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는 사탕무우는 보기 좋고 하얀 설탕을 내 놓았습니다다. 그리고 비쌌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좋은줄 알게 되었고 그래서 하얀 설탕을 사고 먹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슈퍼 물건중에 하얀 설탕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좋은 부분인 비타민, 그리고 광물과 당밀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칼로리와 함수탄소 뿐입니다. 그래도 하얀 설탕은 검은 설탕보다 더 오래 보관할 수 있기 때문에 업자들이 그것만 팔고 싶은 것입니다.

계속해서 끝없이 가공식품과 부과물과 방부제를 받은 식품에 대해서 예를 들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이만하면 우리의 어리석음을 좀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보기좋고 소위 맛있는 식품을 먹기 위하여 기름지고 영양 많은 먹거리를 버리게 되었습니다. 부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재벌들이 인간의 약점을 연구하고 선전을 잘 하니까 먹거리를 조절하게 되었고 우리는 싸우지 않고 그냥 손을 든 것입니다. 이 바보같은 짓을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오히려 일부로 부자들을 더욱 더 부자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것을 소위 문명의 “개화”라고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런 힘없고 독한 식품을 먹어 왔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만큼 우리의 우선 순위와 가치관이 부드럽게 되는 것입니다. 힘없고 부드럽고 물렁 물렁한 먹거리 때문이랄까요? 사람이 쓰레기를 먹으면 쓰레기가 되고 인격마저 파괴되는 것입니다. 즉시 죽어야 죽는 것이고 천천히 죽으면 죽음이 아니랄까요 ! ?

어떤 옛날 이태리의 한 농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땅과 손과 입사이에 최고 짧은 길을 찾으라.”(Find the shortest, singslest way between the earth, the hands and the mauth.) 자본주의가 유지하는 가공을 피하자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도 생각납니다. “독한 화살을 비어라.” 시작하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쉽게 현미, 통밀로 만든 빵 (빵을 먹어야 한다면), 검은 설탕과 순 바다 소금을 먹을수 있습니다. 이 자연스러운 맛은 얼마 안 있으면 익숙하게 될 것이고 건강도 훨씬 더 좋아 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풍요한 동산에서 어리석게 주어간다면 될뻔이나 하겠습니까?

“ 어찌라여 돈을 써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데 써 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 보아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이사야서 55,2)


<참사람되어> 199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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