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영성] 모차르트, 하느님은 음악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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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하는 영성] 모차르트, 하느님은 음악이시다
  • 한상봉
  • 승인 2017.02.0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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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 , 레기날드 링엔바하

‘생활하는 영성’을 주제로 강의를 준비하면서, 왜 갑자기 ‘모차르트’가 손에 잡혔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도통 음악에 문외한이기에 그렇다. 아마도 평소 존경하던 로버트 엘스버그가 지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에서 독일신학자 칼 라너의 모차르트에 대해 언급을 보고, 마음이 동했는지도 모른다.

막상 분도소책 가운데 모차르트에 관한 두 권의 책,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칼 바르트, 분도소책 68권)와 <하느님은 음악이시다>(레기날드 링엔바하, 분도소책 41권)을 읽으며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모차르트에 관한 찬사 일색일뿐 구제성이 결여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묵상집에 가까운 글을 보면서, 도서관을 뒤져서 몇 권의 책을 더 찾아 읽었다. 그제야 좀 모차르트의 얼굴이 좀 떠오를 듯하다. <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제러미 시프먼, PHPNO, 2010), <나를 위로하는 클래식 이야기>(진희숙, 21세기북스, 2009), <음악, 삶의 소리를 듣다>(김종철, 21세기북스, 2011) 등이다.

모차르트를 대중에게 가장 친밀하게 다가오도록 도운 영화라면 가장 먼저 <아마데우스>겠지만, 그밖에 모차르트의 음악을 선보인 <쇼생크 탈출>이나 <아웃오브 아프리카>도 꼽을 수 있겠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제후 겸 대주교의 영향력아래서 음악활동을 했기 때문에 모차르트 역시 바흐처럼 종교음악이 주를 이룰 줄 알았는데, 정작 모차르트는 오페라에 관심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피가로의 결혼>은 당대에 대단한 성공을 이룬 작품이다. 칼 라너와 링엔바하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신성’과 연결지으려고 했지만, 그 신성마저 대중의 일상을 다룬 작품에서 오히려 빛이 났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모차르트, 저녁바람이 부드럽게

영화 <쇼생크 탈출>(1994)에서 주인공 앤디는 은행가로 순탄하다 살다가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년 동안 쇼생크 감옥에 갇혀 지냈다. 진범이 아니었던 앤디는 탈옥을 시도하면서 한편으론 교도소장의 ‘부정한’ 재정관리 맡으면서 신임을 얻는다. 그리고 재소자들을 위한 도서공급과 음반 반입에도 성공한다.

어느 날 교도소 방송실에서 앤디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음반에서 ‘저녁바람이 부드럽게’를 틀어준다. 교도소의 넓은 마당에서 볕을 쬐던 재소자들이 졸지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여성이중창의 신비한 목소리에 넋을 잃고 빠져든다. 교도관이 못 들오게 방송실 문을 걸어 잠그고, 눈을 감고 음악감상을 하는 앤디의 모습이란.

포근한 산들바람이 오늘 밤 불어오네
숲의 소나무 아래 나머지는 그가 알 거야
소리 맞춰 노래해 포근한 산들바람아

이탈리아어로 된 이 노랫말을 죄수들이 알아들을 리 없건만 그들은 곡명도 모른 채 교도소와 전혀 다른 그윽한 음악의 세계에 잠겨든다. 사실 모차르트에게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메시지가 아니라 곡조였던 탓이기도 하다. 앤디의 교도소 절친 앤디는 이 3분간의 황홀한 체험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날 나는 그 두 명의 이탈리아 여자들이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말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편이 가장 나을 때가 있다. 나는 그저 그것이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마음을 저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쇼생크의 모든 사람들은 자유를 느꼈다.”

링엔바하는 <하느님은 음악이시다>에서 모차르트는 “우리를 한 번도 꼭 붙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무엇인가 가리키지만 “그리로 우리를 몰아붙이지도 않는다”고 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교훈적이거나 메시지를 주려고 애쓰지 않는다. 이를 링엔바하는 “모차르트 음악은 내용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바흐의 음악과 달리 교서가 아니다. 베토벤의 음악과 달리 생활고백도 아니다. 그는 어떤 가르침을 음악으로 꾸미지 않으려니와 자기 자신은 더구나 그렇다. 모차르트는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노래하고 ... 그래, 바로 울릴 뿐이다.”(링엔바하)

그것은 따뜻함, 이를테면 ‘사랑’을 주고 있다. 고통스러운 상황이라도 모차르트의 음악에 거친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강렬하든 않든 모든 고통은 결코 혐오가 되도록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음악은 소름끼치는 상태에서라도 결코 귀를 모욕해서는 안 되고,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이를 두고 링엔바하는 “부드러운 사랑이야말로 사람을 살리고 그를 해방하고 다시금 바로 세운다”고 했다. 모차르트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음”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였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모차르트가 아직 어릴 때, 피아노 앞에 앉기 전에 이렇게 묻곤 했다. “나를 사랑하세요? 나를 정말로 사랑하세요?” 이 유치하면서 진지한 질문에 대한 “예”가 확인되고서야 모차르트는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이를 링엔바하는 “사랑을 하려면 인간은 먼저 사랑받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일깨운다”고 했다.

극음악을 사랑한 사나이

음반 <피가로의 결혼>

이런 점에서 모차르트가 미사곡보다 오페라를 사랑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래서 <쇼생크 탈출>에서 연주되었던 <마술피리>야말로 그의 가슴, 정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1791년 완성된 <마술피리>는 왕실이나 귀족들의 의뢰를 받은 작품이 아니었으며, 전문가보다 음악을 사랑하는 보통 청중들을 위한 무대용 오락물이었다.

제러미 시프먼은 <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에서 <마술피리>가 대중적 오페라였지만, “천재성으로 도달한 궁극적인 단순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음악적 기교 역시 뛰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무시무시한 복수를 노래하는 밤의 여왕이 부르는 아리아라고 말했다.

<마술피리>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약 두 달 전에 초연된 작품이다. 극장주였던 요한 엠마누엘 쉬카네더의 제안으로 작곡을 시작했는데, 모차르트와 쉬카네더는 18세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프리메이슨(Freemason)’을 통해 우애를 다졌다고 전해진다.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한 이후 4년만인 1785년, 28세의 나이에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 계몽주의 물결에 힘입어 세계시민주의를 꿈꾸었던 프리메이슨 사상은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해에 작곡한 〈프리메이슨을 위한 장송음악〉 K.477 역시 그러한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다.

<마술피리>는 쉬카네더의 대본에 음악을 붙인 것인데, 1790년 이후 비밀결사단체가 된 프리메이슨의 사상이 담겨 있다는 논란이 있다. 당시 프리메이슨은 계몽사상과 맥락이 닿아 있어서 프랑스대혁명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실제 모차르트의 후원자였던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는 계몽사상에 심취해 농노제 폐지와 수도원 해산 등을 단행했다. 한편 이런 아들과 생각을 달리 하던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와 갈등을 빚었다. 대중들은 <마술피리>를 보면서 나름대로 정치적 상상을 하였는데, 서민들은 자라스트로를 계몽군주로, 밤의 여왕을 전제군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타미노 왕자는 요제프 2세를, 밤의 여왕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파미나 공주는 오스트리아 국민이겠다.

이보다 앞서 발표된 <피가로의 결혼>은 사실상 더 직접적으로 혁명과 연관이 깊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보마르셰가 1784년에 지은 희극을 기초로 로렌초 디 폰테가 쓴 대본으로 모차르트가 1786년에 완성한 오페라 부파(buffa;가벼운 오페라)였다. 보마르셰의 희극은 왕족과 귀족이 지배하던 프랑스 체제를 비판하면서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을 예견했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오페라에서 하층계급인 피가로(백작의 하인)가 지배계급의 권력남용을 이겨내고 사랑을 쟁취했다는 내용은 혁명을 바라던 프랑스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피가로의 결혼> 5막 3장에 등장하는 피가로의 긴 독백은 특권계급의 무능함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유명하다.

“당신은 대단한 귀족 나으리인데다 재능도 많다고 생각하시지요. ... 작위와 재산, 지우;, 수많은 직분, 이것저것들을 모두 꼽아보면 콧대가 높아지는 것도 당연하지요. 하지만 그런 혜택을 받기 위해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노력하신 것으로 따지자면 응애 하고 세상에 태어난 것, 그것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어린 음악신동 모차르트

음악천재, 또는 영원한 어린이

35살에 죽은 모차르트에게 붙는 찬사와 경탄은 형언할 수 없다. 그 맨 앞에 붙는 딱지가 ‘음악신동’이요 ‘음악천재’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대주교를 위한 음악가인 아버지 레오폴트의 1녀 1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3살 때 하프시코드를 능숙하게 연주하였고, 6살 때 처음 작곡을 했다. 7살에 악보를 한 번 보고 선율을 화성으로 만들 수 있었다.

모차르트는 누나 란네를(마리아 안나)와 함께 유럽 순회 여행을 다녔으며, 18세 생일 오기 전에 34개의 교향곡, 16개의 현악사중주곡, 5개의 오페라와 100여개의 작품을 썼다. 16세인 1772년부터 8년 동안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악사장으로 일하다가 1781년 독립해서 빈으로 가서 정착했다. 35살에 죽을 때까지 19개의 오페라와 징슈필, 55개의 교향곡과 23개의 피아노협주곡, 26개의 현악사중주곡, 19개의 피아노소나타 등을 남겼다.

이런 모차르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평생 ‘철없는 아이’로 남아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신의 아들’이라는 평가이다. 황상민 전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가 박근혜 대통령의 정신연령은 17-18세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이처럼 모차르트 역시 발달장애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데,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모차르트를 이처럼 음악이라는 영역을 빼고는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경망한 바보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피가로의 결혼>에서 보듯이, 모차르트는 신의 아들도 아니지만, 경조부박하기만한 철부지도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 사람은 신묘한 구석이 있어서 단순히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다. 물론 기질적 특성을 외면할 수 없지만 말이다.

모차르트의 ‘어린이’ 이미지는 레오폴트 모차르트, 즉 아버지의 지독한 관리의 산물이었고, 모차르트는 이에 부응했다. 아버지는 모차르트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으며, 친구들도 없이 모차르트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도둑맞은 채 유럽전역을 떠돌며 연주하고 작곡해야 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수익성 높은 상품’이었다. 레오폴트는 모차르트가 진정한 예술과 서커스 묘기쇼 사이에서 애써 양다리 걸치기를 하도록 강요했다.

유일한 스승이며 매니저였던 아버지는 아들을 강박하며 최상층 귀족들의 마음을 사려고 애쓰는 한편 어수룩한 중산층이나 선술집의 서민들에게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구애했다. 모차르트의 콘서트를 선전할 때 헝겊으로 건반을 가리고 연주하는 깜짝쇼도 연출했다. 1765년 레오폴트가 <퍼블릭 애드버타이저>의 지면에 실은 광고문은 이랬다.

“식사 숙녀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잉글랜드로 출발하는 일정을 어쩔 수 없이 조금 늦춘 모차르트 씨가 여러분께 알립니다. 백조의 대연회실과 콘힐의 하프 주점에 자리를 마련햇습니다. 매일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이 자리에서 그의 두 천재 자녀가 연주를 들려드립니다. 입장료는 2실링 6펜스입니다.”

모차르트만큼 과도한 칭찬과 찬탄 속에서 자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신동이었고, 다만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애를 품어야 했다. 그는 “연주든 작곡이든 뭔가 이뤄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그런 메시지를 주입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처럼 아버지는 베풀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는 존재였다.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모차르트에게 나타난 현상 가운데 하나가 트럼펫에 대한 공포였다. 트럼펫을 자기 쪽으로 치켜들기만 해도 마치 트럼펫이 탄알을 잰 권총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려워했다. 트럼펫은 강력한 남성, 남근을 상징한다. “꿰뚫는, 공격적인, 독재적이고 위협적인 속성의 상징”이다. 트럼펫이 군대를 집합시키거나 적을 위협하기 위해 고안된 군악기임을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그래서 여행 중에 모차르트는 ‘과거의 왕국’을 상상하며 놀기 좋아했다는 게 누이인 난네를의 후일담이다. 어른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행복한 아이들의 나라다. 늘 어른들에 둘러싸여 있던 모차르트에게 유일한 해방구였던 셈이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기본적으로 음울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프리드리히 멜키오르 폰 그림 남작은 모차르트의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디서 이런 아이를 만나볼 수 있을가 싶을 정도로 기가 막히게 매력적인 아이입니다. 그 아이의 말씨와 행동은 동심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풋풋함이 어우러져 찬란한 생명력과 원기가 넘쳐흐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그 쾌활함은 그 아이가 제대로 영글기 전에 시들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조차 떨쳐냈습니다.”

모차르트

밥벌이의 괴로움, 그리고 예술혼의 승화

1779년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밑에서 월급쟁이 오르간 연주자, 성가대 지휘자, 소년성가대 지도자로 일하던 모차르트는 대주교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극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결국 1781년 25살에 대주교 의전관에게 엉덩이를 차이며 사직서를 던지고 빈으로 갔다. 이후 35살에 죽기까지 10년 동안 생애 최초로 자기 운명의 고삐를 쥐게 되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782년 콘스탄체와 결혼하면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거의 단절되었다.

가정생활은 따뜻하고 편안하고 연민의 정이 흘러넘쳤다고 전한다.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삶에서 내몰림을 당했다고 느꼈으며, 아무도 뚫을 수 없는 침묵의 벽을 쌓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왕실에서 하사받은 호화로운 선물이 그의 취향을 최고급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과 관계없이 최고급 옷이 아니고서는 못 배기는 바람에 살림은 늘 어려웠다.

모차르트는 평생 궁정에 머물렀던 헨델과 하이든이 견뎌낸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창조적이기 위해 자유가 필요했다. 귀족의 저택에서 보수를 받는 하인의 위치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모차르트에게 한 자리 얻어주기 위해 전 유럽을 끌고 다녔다. 더 이상 상류사회에 머물 수 없었던 모차르트는 자신이 단순한 음악가가 아니라 창조자임을 자유를 통해 깨달았다.

그러나 음악가가 하인보다 조금 나은 고용인에서 독립된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삶이었다. 모차르트의 자유의 대가는 배고픔이었다. 빚에 쪼들린 나머지 쥐꼬리만한 돈을 받고 밤낮없이 곡을 써야 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모차르트의 창조성은 더욱 빛을 내기 시작했다. 모차르트 말년의 걸작인 <클라리넷 5중주>와 <클라리넷협주곡>가 그것이다. 이 곡 어디서도 고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목동의 피리소리처럼 평화롭고 수채화처럼 맑고 우아하다”고 평가받는다. 어떤 이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현세를 초월하여 중력을 느끼게 하지 않는, 그저 에테르처럼 투명하고 맑아 그 울림이 천사의 속삭임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칼 바르트는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이 사람에게 이르는 특별하고도 직접적인 접근”이 모차르트의 음악을 낳았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하나의 전환으로서, 그 힘으로 빛은 올라가고,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으나 이어져 간다. 고통을 아주 해소해 버리지 않으나 기쁨이 이를 극복하고, 긍정이 눈앞에 항상 놓여 있는 부정보다 더 강하게 울린다”고 했다. 링엔바하는 아예 “모차르트가 음악을 만든게 아니라, 음악이 모차르트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모차르트는 음악을 보고, 느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음악 속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모차르트는 음악을 받아들이고, 음악을 생각한다. 그 안에는 위대한 작곡가들에서처럼 음악을 위한 초감각적 수신기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바로 수신기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차디찬 얼음이 아니라 따뜻함이며 가까움”이라고 했다. 칼 바르트는 모차르트가 하느님의 겸손한 도구라고 표현했다.

“그는 분명히 스스로 단지 도구로 행할 뿐이다. 그는 분명히 들은 것을, 하느님의 창조로부터 그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그 안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그로부터 벗어져 나오는 것을 듣도록 만드는 바로 그 겸손함 속에서.”

그래서 모차르트를 말할 때는 우리는 ‘더듬거리게 된다’고 말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모차르트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묘지도 없이 소멸된 모차르트
음악에서만 만날 수 잇는 모차르트

1787년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를 작곡하였지만, 생활은 더욱 쪼들렸다. 수입이 뚝 떨어지자 모차르트는 잠시 공직에 다시 들어갔다. 오스트리아 빈 궁정 실내악단 악사였다. 그러나 1788년 터키와 전쟁이 벌어지고 세금과 군비가 증가되자 요제프 2세 황제의 개혁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1789년 누이동생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혁명으로 처형되자 상황은 더욱 어두워졌다. 1788년 오페라 단체들이 해산되고, 극장들도 문을 닫았다.

모차르트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감당할 수 없었고, ‘품위있는 거지 신세’로 전락했다. 누나는 죽고 아내는 병들고 네 자녀 중 살아남은 아이는 단 하나였다. 다행히 1791년 <마술피리>가 성공했다. 그리고 10월에 발제크 백작에게서 <진혼곡; 레퀴엠>을 위뢰받아 작업했지만 미완성인 채로 12월 5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사망했다.

그는 슈테판 대성당에서 3마일 떨어진 빈민지역에 있는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쓸쓸하게 옮겨져, 리넨 자루에 담긴 채 다른 주검들과 함께 매장되었다. 황제 요제프 2세는 전통장례의식의 불필요한 낭비를 싫어해서, 자신의 재위기간에 영구차 뒤를 조문하는 행렬도 없애고, 자루매장 방식을 규범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죽음을 두고 빙엔바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놓은 것이라곤 없는 사람을 위하여 그 이상 어울리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이제 모차르트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 속에서만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유언은 그의 음악 속에 쓰여있기 때문에 언어도 비석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1787년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가 죽기 전에 병석에 누워있을 때, 모차르트는 사실상 프리메이슨 문서에나 나올법한 이런 편지를 썼다.

“우리가 곰곰이 명상해볼 때, 죽음이란 이승의 삶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표이기 때문에, 저는 이 인류의 가장 진실한 친구와 너무나도 가깝게 사귀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때 나를 두렵게 했던 죽음의 이미지가 이제는 저를 진정시키고 위로해줍니다. 죽음이 참된 행복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 이대로 다음 날을 맞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곤 합니다. 아직 젊은 제가 말입니다.”

칼 바르트는 신학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늘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쇠렌 키르케고르는 온 교회가 “모차르트를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시는 것을 인정하도록 만들겠다. 그렇지 않다면 이탈하여, 그들의 신앙에서 갈라서서 모차르트만을 영화롭게 하는 종파를 창설하겠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찬사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의 가장 위대한 점은 사실상 “모차르트 없이 모차르트 음악을 이루었다”는 데 있다.

그의 삶의 세세한 부분을 어떻게 평가하고 조롱하고 찬미하든, 모차르트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도구를 통해서도 당신의 음악을 연주하신다”는 것이다. 아니면 모차르트의 ‘어린이다움’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링엔바하는 “하느님은 놀라움을 즐기신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음표들은 실상 하느님을 향한 수없는 다가섬”이라고 했다. 하느님은 “언어의 저편”에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음악이시다”라고 말한다. 손에 잡히지 않으나 분명한 곡조로 마음을 울리는 분이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1987년 4월 11일 모차르트는 이런 글을 남겼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음악이다.
하느님은 음악이시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이는 나를 끝없이 행복하게 만든다.

숭고한 지성도
환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 둘이 합쳐져서
천재를 만들지도 않는다.
사랑! 사랑! 사랑!
이것이 천재의 영혼이다.

(모차르트의친구 Gottfried von Jacquin의 기념첩에서)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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