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몰라도 돼" … 철학하는 중세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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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몰라도 돼" … 철학하는 중세여성들
  • 유대칠
  • 승인 2017.02.07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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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1

[유대칠 칼럼-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1]

‘중세철학’에서 여성의 자리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중세철학사에 소개된 철학의 공간들, ‘중세대학’과 ‘수도원’ 그리고 ‘성당학교’ 등 어디에도 여성의 자리를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중세 이탈리아 대학엔 몇 명의 여교수가 법학 등을 가르쳤다지만, 그 정도로 남녀 모두를 위한 공간이라 할 순 없다.

누가 무엇이라 해도, 중세 스콜라철학의 공간인 대학은 남성의 몫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 그리고 둔스 스코투스 등이 치열하게 철학과 신학을 다투던 바로 그곳은 남성의 공간이었다. 중세대학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 역시 남성의 언어였다.

라틴어는 남성의 독점적 언어

대부분의 중세여성들이 라틴어를 몰랐다. 귀족 가문에 태어나 개인 교사를 두고 교육을 받을 지위에 있지 않다면, 여성이 라틴어를 익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당학교나 수도원학교에서 라틴어, 산술, 기하, 음악학, 천문학, 수사학, 논리학, 문법학 등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선택받은 일부 남성이었다.

전형적인 귀족가문 출신의 힐데가르트 폰 빙엔과 같이 라틴어를 배우고 익힌 여성은 절대 흔하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 지위의 여성이라도 대학이란 공간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고 학자로 성장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힐데가르트 폰 빙엔 역시 당시 지중해 연안의 가장 일반적인 철학 교육의 형태인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의 연구와 주해를 익히지 못했다. 중세 유럽 신학에 있어 대표적인 문헌인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을 주해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남성의 공간인 대학 혹은 수도원학교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즉, 당시 ‘철학의 공간’은 남성의 몫이었다. 여성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대학에 갈 수도 없고, 철학과 신학을 깊이 공부해 학자가 성직자가 될 수도 없었다. 그러니 굳이 라틴어를 가르치는 공간도 없었고, 배우려하지 않았다. 높은 지위의 여성들조차 라틴어를 익힌 남성을 불러 자신의 뜻을 라틴어로 받아 적어 달라 부탁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해보자. 가난한 여성들에게 라틴어나 철학 그리고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그러한 이야기였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

힐데가르트도 귀족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부분 중세 여성들은 질병에 취약하여 오래 살지 못했다. 출산의 고통으로 많은 여성은 고통 속에 죽어갔다. 장신구는커녕 제대로 된 옷조차 입지 못하고 추위에 떨었다. 이것이 중세 여성의 일상이다. 가난한 중세 여인에게 귀족가문 여성이 누리는 삶은 꿈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수녀가 되고 수녀원장이 되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어려움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하며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귀족 출신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하늘에서 내려온 신비의 빛에 따라 이루어진 그녀의 사상에선 낮은 자의 고통에 대한 강한 공감과 깊은 연대가 그리 강하게 읽히지 않는다.

수녀가 된다는 것, 그리고 수녀원장이 된다는 것이 중세라는 시간 속에선 지금보다 더 힘들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사실 중세 여성들에게 수녀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인 삶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여성으로 자신의 위상을 인정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중세, 수도원장은 여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였다. 수녀원장이 아니라, 수녀가 된다는 것도 가난한 여성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수녀원은 부유한 이로 가득했다. 수녀가 되기 위한 제법 많은 지참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녀원은 부유한 이들의 딸로 가득했다.

가난한 여인에게 수녀원도 철학의 공간이 아니었다. 중세철학사에서 접하는 철학의 공간들, 대학, 수도원, 성당학교 그 가운데 어느 곳도 여성을 위한 철학의 공간은 없었다.

베긴의 여성들, 민중과 더불어, 일상에서 철학을 하다

그러면 다시 생각해보자. 구조화된 철학의 공간이 허락되지 않은 중세여성에게 철학은 없었는가? 진정 필요가 없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당시 여성들도 인간 보편의 아픔을 가지고 살았다. 단지, 그 철학의 공간이 대학이나 수녀원이 아니었다. 그 외부였다. 그녀들의 철학은 그녀들의 삶 속에서 자랐다.

메히틸드 폰 막데부르크

대학의 언어인 라틴어로 쓰이지 않고 그들 삶의 가장 흔하디흔하고 편한 일상어로 기록되고, 대학의 강의실이 아닌 이웃과의 공간 속에서 철학했다. 대학 강의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과 교부 문헌을 읽으며 고민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공간에서 각자의 삶이 허락한 삶의 아픔 앞에서 치열하게 궁리하고 궁리하며 철학했다.

예를 들어, ‘베긴’(Begin)를 보자. 평신도 여성들이다. 독신을 선언했지만, 막대한 지참금을 주고 수녀원에 입회하지는 않았다. 그녀들은 일상의 삶, 그 공간에서 ‘철학’했다. ‘철학’으로 살았다. 힘든 일상의 공간에서 민중들과 함께 살았다. 흑사병으로 아파하고 권력자들의 폭압으로 아파하는 민중의 옆에서 그들과 더불어 ‘신학’하는 삶을 살았다.

마을의 평신도들이 느꼈을 굶주린 교육을 해결하려했고, 마을 곳곳 힘든 일들을 함께했다. 민중의 고통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은둔자의 모습으로 하느님을 만나기보다는 일상의 삶 속에서 매순간 이웃의 고통과 웃음 가운데 하느님을 마주하며 그렇게 깨우치며 살아갔다.

그들은 신학이나 철학적 소신 없이 그저 착하기만한 성당 누나 혹은 언니였을까? 그렇지 않다. 체계적인 논리 속에 담긴 합리적 구조물을 만들지 않았을 뿐이다. 아집으로 고집한 논리적 구조물을 주인으로 삶지 않았을 뿐이다. 베긴에게 삶 자체가 치열한 궁리함의 결실이고 결단의 결과다. 논리적 구조물이 아닌 삶이 철학의 결실이고 마지막이었다.

교회권력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단이라 하고, 마녀라며 그녀들을 지워갔다. 마침내 후기 중세를 걸치면서 사상사에서 그녀들은 완전히 지워진다. 일상 속에서 철학과 신학으로 살아가던 베긴은 그렇게 사라진다. 이후 철학과 신학의 공간을 ‘대학’ 등으로 한정한다. 아픈 시대, 낮은 자의 모습으로 궁리하고 고민하던 이들의 그 철학을 지워버린 셈이다.

번뇌의 공간이 철학의 공간

힐데가르트 폰 빙엔과 같이 권력자에게 조언하고,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이상한 자기만의 문자를 만들고,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신비의 빛을 보며, 고상한 라틴어로 글을 적는 여인의 모습이 대단해 보일지 모른다. 대단하다. 천재적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와 다른 영웅을 찾으려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깨우침은 ‘번뇌시도장’(煩腦是道場)의 깨우침이어야한다. 번뇌로 가득한 이 공간이 바로 깨우침의 공간이란 말이다.

인간이 살아가며 서로 다투고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이 번뇌의 공간에서 얻어진 깨우침, 그 민중 속에서 깨우침이 참 깨우침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얻어진 자기만의 깨우침보다 더욱 더 강한 깨우침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일상의 공간을 철학의 공간으로 살았던 베긴의 사상이 민중들 사이에 빠르게 퍼진 것일지 모른다. 베긴의 깨우침은 바로 우리네 일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바로 이곳에서의 깨우침이기 때문이다. 중세 여성의 철학, 그 철학은 어쩌면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더 소중한 무엇을 줄지 모른다. 그녀들의 철학, 그 철학의 공간은 바로 우리네 삶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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