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 붕어처럼 서로의 침으로 몸을 적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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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 붕어처럼 서로의 침으로 몸을 적시는
  • 최충언
  • 승인 2017.02.07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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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언 칼럼]

당뇨가 나에게 찾아온 걸 알게 된 건 전공의 2년차 때였다. 그러니까 당뇨 이력이 25년이나 되었다. 지금은 동네의원의 주치의에게 두 달에 한 번씩 가서 당뇨약 처방을 받는다. 지난 번 갔을 때에 나는 주치의로부터 야단을 들었다. 혈당치가 높았던 것이다. 세 종류의 약을 먹고 있는데도 혈당조절이 잘 되지 않으니 이 일을 어쩌랴. “이렇게 조절이 안 되면 인슐린 주사로 바꾸는 수밖에 없어요. 같은 의사니까 잘 알 테지만, 먹은 만큼 움직여 열량을 소모해 줘야 합니다. 운동 많이 하세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을 떠올리며 처방전을 들고 씁쓸히 의원 문을 나섰다.

흔히들 당뇨는 입이 마르고, 물을 많이 마시게 되고, 소변을 많이 보는 증상이 있는 병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증상의 하나가 급격한 몸무게 감소다. 물론 갈증이 있었으나 나의 경우는 갑자기 몸무게가 9Kg이나 줄었다. 검사를 해보니 당뇨였다. 그때부터 약을 날마다 먹는 신세가 되었다. 물론 집안 내력도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소갈증이 있다고 들었다. 아버지도 말년에 백내장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했을 때 처음으로 당뇨가 있음을 알았다.

사진=최충언

운동부족 당뇨환자가 되어

의사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는 동안에는 병원의 귀신이 되어야한다. 한해에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간혹 집에 가기도 하지만, 밤낮 없이 오는 콜을 받아야만 하는 병원자본의 반노예였다. 식사시간도 불규칙하고, 수술을 한다고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식당에 갈 수 없으니 병원 근처 돼지국밥집에서 질릴 정도로 순대가 들어간 돼지국밥을 참 많이도 먹었다. 지금은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주로 풀을 많이 먹는 편이다. 튀긴 음식이나 기름기는 피하는 식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혈당조절을 위해서는 식이조절과 운동 그리고 약이 중요하다. 당뇨 진단을 받고 나서 나름 운동을 한다고 조깅도 해보았다. 아침마다 영도다리 밑을 뛰어다녔다. 땀으로 등이 흥건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이게 사는 건지 싶었다. 맛있는 음식도 절제해야 한다. 살기위해 운동하는 것인지, 운동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노동사목 식구들과 ‘하체 떨림 산악회’를 만들어 토요일마다 부산 근교의 산으로 등산을 많이 다녔다. 그러다 세월은 흘러 당뇨 합병증으로 관상동맥이 좁아졌다. 당시는 개업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흉통이 왔다. 직감적으로 협심증이라는 진단이 떠올랐다. 결국 관상동맥에 스텐트 하나를 박는 신세가 되었다.

이제는 그 좋아하던 등산도 겁이 나서 못한다. 혹시 산에서 심장발작이 오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생긴다. 운동은 해야 하는 데 헬스나 골프는 체질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이 온다. 돈도 들지 않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이 걷기다. 의사라는 직업이 신체활동량이 적은 직업군이다. 회진을 도는 것이 움직임의 전부다. 수술을 하거나 진료실에서 환자를 진찰하는 것은 신체 움직임이 적다. 주치의에게 야단을 맞고 난 뒤, 점심시간 한 시간을 활용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50분의 시간을 걷기에 할애하고 주 5일을 걷다보면 운동효과가 있지 않을까.

사진출처=busanstory.godohosting.com

마음까지 보살펴 주는 걷기...산복도로와 골목길 산책

부산이라는 곳은 지형이 배산임수형이라 산복도로와 골목길이 유난히 많다. 마침 일하는 병원이 모교 부근인 송도지역이라 대학시절부터 자주 다녔던 골목길이다. 길을 걷다보면 옛일들도 많이 떠오른다. 내리막길이 있으면 빠른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만나면 느린 걸음으로 걷다보면 심장 박동이 빨라짐을 느낄 수 있다.

걷기는 글쓰기와 비슷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고 삶을 반성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걷다보면 오만가지 기억들이 떠오르고 곱새기다보면 지나온 삶을 반성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네 삶도 즐거운 기억과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엮은 실을 씨실로 삼고, 보이지 않는 돌봄의 손길을 날실로 삼아 짜는 교직물이 아니겠는가.

숲길을 걸을 때는 새들의 지저귐과 비람소리에 나무가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골목길을 걸으면 아이들의 노는 소리와 야채행상을 하는 할머니들을 만나기도 하고 힘겹게 파지를 싣고 가는 할아버지를 만나기도 한다. 루쉰은 말했다. 갈림길을 만나면 잠시 자리에 퍼질러 앉아 담배 한 대를 붙여 물고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을 천천히 돌아보겠다고. 그리고는 가야할 길을 후회 없이 걷겠다고. 내가 걸어온 길이 누군가에게 좋은 이정표가 될 수 있다면 욕심일까, 오만함일까. 그 길이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느님 사이를 이어줄 수 있다면 후회 없는 삶의 길을 걸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 아버지와 시골 외갓집에 갈 때 신작로를 걸었다. 걷다보면 아버지가 앞서가니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가 또다시 간격이 벌어지고 또 뛰어가고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연로하신 아버지가 병원으로 찾아오셔서 같이 걸어간 적이 있었다. 힘이 약해져서 동행하며 아버지의 걸음걸이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걸으면서 보조를 맞추었던 기억이 또렷하게 났다. 어려서는 네발로 걷고, 커서는 두발로 걷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세발로 걷는 동물은? 학동기 때의 수수께끼가 기억이 나 속으로 피식 웃은 적이 있다.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게 사람이다.

사진=최충언

걷는다는 것, 저항한다는 것

장수의 비결은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다. 현대문명은 사람이 덜 움직이도록 발달해왔다. 승강기, 에스컬레이트, 자동차, 텔레비전, 스마트 폰을 생각해보면 수긍할 것이다. 집은 없어도 승용차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요즘 세태다. 인간은 동물이다. 움직이는 생물이다. 문명의 이기가 이런 인간의 속성을 퇴화시키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인병이 생기는가 보다. 나는 여태 자동차를 가지지 않았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거나 무슨 거창한 환경론자여서가 아니다. 그냥 차에 대한 흥미가 손톱만큼도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은 순례길이라고 한다. 나는 순례길이라는 단어에서 리 호이나키가 쓴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걷다>라는 책을 떠올린다. 한 미국 지식인이 궁극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근대세계의 어둠을 뚫고 걸어간 오디세우스적 여행의 궤적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 전체의 밑바닥을 관류하고 있는 이미지 - ‘거룩한 바보’야말로 궁극적인 희망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이다. 체제에 순응하기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거룩한 바보’에 의한 저항이 계속되어 오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벌써 끝났을 지도 모른다.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 애덕의 길, 정의의 길을 교회는 이야기한다. 예수 자체가 길이다. 정의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편들기에 가까운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도 가난한 이들을 특별이 사랑하시는 편애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더욱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신다. 하느님의 정의는 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에 대한 자비로 기울었으니 말이다.

이웃을 위해 울어주는 일,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하룻밤 잡아주는 일, 자신의 슬픔을 참아내는 일, 임금과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줄이면서 유지되는 ‘킬러-자본주의’사회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철폐운동에 연대하는 일 등등. 정의의 길을 비틀거리면서도 걸어가는 것이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의 갈증을 식혀주지 않을까?

“말라가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속에서 붕어는 침으로 서로의 몸을 적신다.”고 장자는 말했다. 이런 작은 몸짓이나마 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길들여진 슬픈 짐승으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순례길을 걷다가 길을 모르면 물으면 될 것이고, 길을 잃으면 헤매면 그만이다. 어차피 길이란 어디론가 통하게 마련이다. 좀 돌아가더라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만 있다면 조금 빨리 닿고 늦게 도착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붕어처럼 서로의 침으로 몸을 적시는 실천을 할 수만 있다면.


최충언 플라치도
외과의사.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단팥빵-어느 외과의사의 하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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