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도 사제도 해결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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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도 사제도 해결사가 아니다
  • 참사람되어
  • 승인 2017.01.31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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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되어-6

주먹을 꽉 쥔 채

사제의 삶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때에 나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무엇인가? 요즈음 나는 몹시 피곤해 있고 긴장되어 있음을 느낀다. 주먹을 꽉 쥐고 “올 테면 와라. 무엇이든 다 잘 해내겠다.”는 돌격자세이기에 더욱 피곤하다.

누가 그렇게 시킨 것도 아닌데(?) 기를 쓰고 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더 사랑 받고, 무엇이든 근사하게 해내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팔방미인이 될 것인가

오늘날 사제에게 가장 큰 유혹은 팔방미인이 되려는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점점 전문화되어가고, 분업화되면서 사람의 역할은 전체를 보는 일보다도 세세하고 부분적인 일에 전문성이 요구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점점 세상에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허무하고 공허한 부분이 채워지기를 갈망한다.

그런 갈망이 교회에서 채워지기를 어떤 사람들은 바라나, 고도로 전문화되고 있는 사람들의 갈망을 일일이 채워주기엔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다. 그렇지만 옛부터 사제의 역할은 팔방미인으로서 모든 일에 마치 해결사처럼 인식되어 왔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여겨져 왔다. 그리고 그 요청에 다 부응하지 못할 때 사제로서 살아가는 의미를 사제 자신이 잃어버리기 쉬운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에 해결사가 되려고 할 때 결국 긴장되고, 주먹을 꽉 쥔 채 펴지 못하는 것이다.

Helena Cherkasova (b1962, Moscow, Russia)

광야에서 해결사가 되라는 유혹을 받으신 예수

복음에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다고 하지만, 되짚어보면 아마도 그 유혹은 예수님의 내적 갈등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배가 고픈 상황에서, 배고픈 세상을 보고 한순간의 기합소리로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행복으로 가득찬 세상을 만들고 싶은 열망, 또 대항해 싸우기에는 너무나 힘든 세상의 권력과 오염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내가 대통령이 되고 혁명가가 되어 한 세상을 주름잡고 모든 사람이 만족하는 세상으로 뒤집어 보고 싶은 갈망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출귀몰하는 신선으로 둔갑하여 사람들에게 신비로운 인물로 비쳐지고, 기적을 행하며 동에 서에 번쩍번쩍하는 존재, 아픈 사람을 보면 안수로 뼛속까지 스미는 전율을 느끼게 하고픈 생각 등, 오늘의 내가 겪고 있는 유혹과 비슷한 갈등을 겪으셨을 것 같다.

성령 안에서 긴장을 풀고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안에서 나오는 해결사가 되고 싶은 강한 욕구에 대해 단호히 태도를 결정하신다. 즉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세상이 굶주려도 사람에게 마지막 힘을 주는 것은 '영적인 '것이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말처럼. 또 세상에 섬길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세상의 권력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또 다른 세상의 권력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시다.

결국 예수님은 모든 힘의 근원을 말씀, 하느님의 성령 등 오직 하느님께만 뿌리를 둠으로써 갈등을 헤쳐나가신다. 즉 분명한 태도 결정과 선택으로 인해 해결사가 되려는, 강한 욕구로 꽉 쥔 손과 긴장된 마음을 풀어 주먹을 펴고 살갗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성사를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근본적인 고백이 결국 나의 꽉 쥔 손을 펴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부활, 슬퍼하는 이와 함께 슬퍼하는 것

나는 왜 점점 무디어져 가는가?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오늘 사순절기가 나에게 주는 의미일 것이다. 긴장되고 꽉 쥔 손 때문에 도무지 깊은 기도에 들어가지 못한다. 기도는 마음을 열고 비울 때 비로소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선물이기에 내가 기를 쓴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돌덩어리 같은 내 안간힘과 기로 가득차 있으니 주변의 사람과 삶에 깨어있고 향해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깨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슬픈 이들을 찾아 나서고 슬퍼할 일을 찾아 나서고 싶다. 슬퍼하며 괴로운 나날을 살고 있는 이웃이 있는 줄을 모르고 살아가던 내가, 내 중심에서 벗어나 인간의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 아파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깨어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일 것이다.

내 주변의 여러 사람을 떠올려 본다. 어떻게든 사랑하면서 살려고 애썼는데 결국 법원에 가서 이혼도장을 찍고 무엇을 후회하는지도 모르는 채 전화에 대고 눈물을 흘리는 그 마음을 어떻게 해 줄 수 없었던 선이 엄마, 잘 살아보려고 꽤 비틀거리다가 지금은 이판사판 공사판인지, 남편과 아내가 제각기 노름과 술로 하루를 사는 철민이네, 2천년이면 없어진다는 나병이지만 아이들을 다 키워 보내고 나면 남은 생애를 걱정해야하는 나환자들이 떠오른다.

손으로 몸으로 말하는 농아들이 마치 유태인이 나치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듯, 자유롭게 일 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들, 장애자인데 교통사고로 다쳐서 한 쪽 팔마저 잃을까 두려워서 새 일자리를 찾는 중희를 보고 그런 일자리가 있을까하고 생겨나는 의구심, 그리고 세상의 평화, 정의를 위해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자신을 바쳐 일해온 사람들 앞에서 무기력하게만 느껴지는 나. 이처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많으나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기에 나는 더욱 긴장되고 답답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깨어있도록 느슨하게

그러나 예수님의 유혹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이런 불편한 일들, 마음 아픈 일들, 도무지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일들 가운데, 부서지고 약해져버린 사람들 가운데에 그런 약한 모습으로 함께 하며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셨던 일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이 정리된다.

아픔을 잊지 않고 끈끈하게 줄을 이어가는 노력가운데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시리라는 태도, 결정이 결국 내 긴장을 풀게 하리라고 믿어본다. 그래서 해결사가 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 근본적인 태도에 대하여 늘 기억하고 실제 생활 속에서 그런 태도를 선택하는 것일 뿐이라고 다짐한다.
 

출처/참사람되어 199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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