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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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 한상봉
  • 승인 2017.02.0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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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사진=한상봉

내가 늘 작업대 앞에 두고 보는 그림타일이 하나 있다. 터키에 갔을 때 코니아에서 사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슬람 신비가인 어느 수피 한 분이 코란을 손에 들고 수염을 매만지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코니아는 메블라나 젤랄루딘 루미(jelâlledin mohemmed-e rumi)가 살았던 도시이다. 그는 1207년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지만 몽골족의 침략을 피해 이슬람의 신학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1228년 터키의 코니아로 이주했다. 당시 코니아는 실크로드의 서쪽 끝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 그리고 불교의 세계가 공존하는 곳이어서 루미는 그 모든 종교와 현자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루미는 훗날 이란의 타브리즈에서 온 방랑자, 춤추는 수피 신비주의자 셈스를 만나 소통하면서, 전통적인 신학자와 법률가의 삶을 버리고 춤추는 시인이 되었다. 특히 루미는 ‘연애시’로 유명한데, “사랑이 길이고 우리 예언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인들의 생명은 죽음 속에 있다.
네 가슴을 잃어버리기까지는
사랑하는 이의 가슴을 얻지 못하리.”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루미, 샨티, 2005)에 실린 시를 해설하면서, 이현주는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기를 몽땅 내주어 기꺼이 또는 아프게 흡수 통일되는 것. 그대 누구 앞에서 잠시라도 없는 존재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비우시고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예수는 없고, 당연히 그리스도교 신앙도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심을 버리고 인간이 될 만큼 인간을 사랑하셨다. 예수가 “우리를 사랑한 나머지” 죽기까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면 십자가도 부활도 없었을 것이다. 신앙은 그런 사랑을 요구한다. 나 없어도 좋을만한 사랑 말이다.

도종환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에는 ‘듀엣’이란 시가 있다.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산다는 말이 맞는다면, 사랑 때문에 돈도 벌고, 사랑 때문에 공부도 하고, 사랑 때문에 싸움박질도 하고, 사랑 때문에 사랑도 하는 것이라면, 사랑을 알면 모든 걸 아는 셈이다. 사랑을 하고나면 죽어도 좋은 것이다.

내가 그대 눈빛을 바라보며
천천히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면
그대가 내 목소리를 포근히 감싸안으며
둘째 소절을 받다 부르고
내가 그대 입술을 바라보며
그대와 함께 있는 시간의 끝까지
그댈 사랑하겠노란 노랫말을 샘물처럼 흘려보내면
사랑이라는 말부터 그대 목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따듯하게 젖어 내 노래 깊은 곳으로 들어오고
...
그대와 함께 부를 수 있다면
노래의 끝에서 내 생이 멈추어도 좋겠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랑이 어려워진다. 어쩌면 단 한번도 그런 사랑이 해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심수봉이 부른 ‘백만송이 장미’에서는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우고 오라는” 게 인생의 의미라는데, 그런 사랑을 예수님 공부하면서 배웠지만, 예수님처럼 살지 못했다. 루미에게서 깨달았지만 루미처럼 사랑하지 못했다.

TV 쿡방의 <냉장고를 부탁해>, <삼시세끼>, <집밥 백선생>을 틈 나는대로 본다고 혀가 호강하거나 뱃속이 든든해지는 것은 아니다. 직접 음식을 만들고, 밥숟가락을 들어야 몸이 행복해진다. 그러니 ‘사랑’을 혀에 올리지 말고 손으로 사랑하자고 다짐하는 오늘이다.

루미의 묘비석에는 “오라, 그대가 누구든. 신을 버린 자, 이방인, 불을 경배하는 자, 누구든 오라. 우리들의 집은 절망의 집이 아니다. 그대가 비록 백번도 넘게 회개의 약속을 깨뜨렸다 할지라도. 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우리도 백 번 넘게 사랑하자는 약속 너무 자주 깨뜨리곤 하지만, 그래도 지치지 말고 집에서 거리에서 성당에서 세상 끝에서 ‘사랑연습’ 해보자. 

출처/ <나무그늘> 의정부교구 소공동체 잡지 2017년 2월호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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