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밤바 인디언들의 주교, 레오니다스 프로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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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밤바 인디언들의 주교, 레오니다스 프로아노
  • 죠셉 멀리간 신부 (예수회)
  • 승인 2017.01.3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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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들의 주교”로 알려진 에콰도르의 주교 레오니다스 프로아노는 그의 고향인 산 안토니오 드 이바라에 가까운 푸카후아이코의 원주민 여성선교사 양성센터의 경당에 묻혀 있다. 무덤 위에 제단이 있고 비스듬한 지붕의 큰 유리창을 통하여 임바부라의 장엄한 봉우리가 보인다. 원주민들은 이 봉우리에 서 창조주의 현존을 특별한 방식으로 깨닫는다.

1910년에 태어난 레오니다스 프로아노는 1936년에 사제서품을 받았고 1954년에 리오밤바의 주교가 되어 1985년 은퇴할 때까지 교구장으로 있었다. 그는 은퇴한 후에도 교회를 계속 섬겼고, 198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특히 인디언들을 위해 봉사했다.

프로아노 주교의 정신은 에콰도르에서 특히 원주민들과 교회활동가들 그리고 정의와 인권보호에 투신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그는 1980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아돌포 페레즈 에스퀴벨의 추천으로 1986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지명된 적도 있다. 그리고 1988년에 넬슨 만델라 등 다른 네 사람들과 함께 인권분야에서 유엔이 주는 상을 받았다.

신앙은 추상과 개념의 세트 아니라 매일의 실천  

1976년 에콰도르 경찰이 프로아노 주교가 다른 주교들과 많은 사제들,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들을 초대하여 했던 세미나를 습격했을 때,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구속되었고, 관련 자료와 소지품들은 압수되었다. 이들은 수도인 키토로 압송되었는데, 다음날 몇몇 외국인들은 추방되고, 다른 사람들은 석방되어 스스로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억압적인 행동은 에콰도르 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인데, 1972년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프로아노 주교의 세미나가 “정부의 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세미나는 에콰도르의 불의한 사회경제와 정치현실을 분석하고 복음화를 위한 사목계획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들은 사목자료 초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교회는 정치적 권력을 가지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다른 어떤 정당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없다. 이처럼 교회의 행동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지만, 모든 행동들은 불가피 하게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경찰 습격이 있은 지 일주일 후 라디오방송에서, 프로아노 주교는 “우리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알 권리가 있다.”면서 “복음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그분은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해방의 울부짖음이다. 복음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가져온 사명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진실들의 묶음이 아니며, 단순히 개념과 정의의 세트도 아니다. 또한 신앙은 단순히 이념적 사고 과정의 결과도 아니다. 우리에게 신앙은 매일 살아내며 실천하는 것이며, 악과 거짓, 불의와 증오에 대한 투쟁이다. 우리는 어둠에 사로잡혀 있고 죄에 의해 멸 망되는 이 세계 한 가운데에서 구원의 성사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 교회의 능동적인 구 성원들이 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미의 신앙을 거부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이 겸 손한 사람들, 농부들, 노동자들, 보통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한다.”

내적인 회심과 사회개혁은 복음의 본질적 요청이다

프로아노 주교는 1977년, 자서전 <나는 인간존재와 공동체를 믿는다>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라는 부르심을 받았고, 이렇게 갈라진 세계 한 가운데에서 공동체생활

의 징표와 증거가 되라는 초대를 받았다.”고 말한다. 거룩한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와 죄스러운 우리 마음의 근원적인 회심을 분명히 포함한다.

1989년 11월 16일 다른 다섯 명의 예수회 회원들 그리고 두 여성들과 함께 살해되었던 이그냐시오 엘라쿠리아 신부(예수회, 산살바도르 중앙아메리카 대학교 총장)는 죽기 열흘 전 바르셀로나에서 한 강의 중에 이와 비슷한 내용을 말했다. “우리는 역사의 길을 전환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1965년부터 1982년까지 예수회 총장이었던 페드로 아루페 신부는 1973년 유럽의 다양한 곳에 퍼져 있는 예수회 학교의 동창모임에서 1971년에 발표된 세계주교시노드 문서에 나오는 말을 인용했다: 

“정의를 위한 행동과 세계개혁 활동에의 참여는 복음 선포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임이 명백하 다. 즉, 인류를 구원하고 온갖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할 교회 사명의 일부인 것이다.”

아루페 총장은 2차 대전 중 33일 동안 일본군의 포로로 살면서 억압을 경험했고,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를 직접 목격했다. 훗날 이를 두고 “공포”이며 “대량 학살”이라고 표현했다. 아루페 신부는 이어 말한다. 

“내적인 회심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자신을 온통 하느님께 돌려 드리라고 요청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세계를 하느님께 돌려드리라고 요청한다. 우리는 개인의 변화를 구조적이며 사회적인 개혁과 분리 시킬 수 없다.”

세계 전체의 변화와 역사를 되돌리는 노력은 프로아노 주교가 교회의 다른 많은 예언자들과 나누었던 중요한 주제들이었다. 에콰도르에서 주교로 31년 동안(1954~1985) 봉직하면서, 레오니다스 프로아노 주교는 메데인 주교회의에서 천명한 교회의 사회참여,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해방운동 때문에 교회가 받은 박해들을 모두 목격하고, 군사정권의 박해를 직접 몸으로 겪었다.

교회의 침묵은 치명적인 죄악

1976년 10월 12일, 예수회의 조아노 보스코 부르니에 신부는 페드로 카사달리가 주교와 브라질의 한 교도소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두 여인이 고문당한 증거를 조사하고 난 후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1977년에는 엘살바도르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예수회)가 두 농부들과 함께 암살당했다. 그란데 신부가 사목적 결단을 통해 농부들을 조직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가난한 이들과 사회정의 활동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결국 로메로 대주교 역시 1980년 군부에서 보낸 암살자에게 살해되어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 시기는 사제들, 수도자들, 평신도 지도자들에 대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잔학행위가 중앙아메리카에서 일어났던 때였다.

이러한 예언자적 모습들을 보면서, 프로아노 주교는 참된 복음화에 치명적이라고 간주했던 세 가지 죄악을 피할 힘과 통찰을 얻었다. 여기서 치명적인 죄악이란 교회가 기득권 때문에 불의한 정권에 저항하지 않고 침 묵하는 것이다. 

“교회에 가장 치명적인 죄악은 교회가 이 세상의 정치권력과 명확하든 암묵적이든 동맹을 맺 는 것, 교회의 특권을 유지하려고 잘못된 개념의 고요함에 매달리는 것, 그리고 정의가 짓밟힐 때 침묵하는 것이다. 그러한 침묵은 기존의 체제, 죄악의 상황과 함께 공모하는 것이므로, 교회의 사명과 복음에 대한 배반이다.”

               
출처_ <CATHOLIC WORKER>, 2007년 3월 참사람되어, 2007년 9월호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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