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가장 '신학'적이고 가장 '시'적인 요한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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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가장 '신학'적이고 가장 '시'적인 요한 복음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1.30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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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와 요한의 복음서-6
사진출처=metmuseum.org

마르코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마르코는 제일 먼저, 요한은 제일 나중(A.D. 90~100경)에 기록되었으므로 예수의 삶과 메시지에 대한 묵상이 한 세대 정도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요한의 목적은 그가 요한 복음서 말미에 분명히 기술했듯이 마르코의 의도와 비슷하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20,31)

요한의 도전: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이해하기 위하여

마르코와 마찬가지로 요한도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가르친다. 그는 독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키워나가고 그 믿음을 통해 아버지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에 관심이 있다. 복음사가는 미래역사를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일어난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기가 주님과 맺은 관계, 그분으로부터 자기 삶을 이끌어낸 관계를 전달하려고 한다.

요한은 종종 다른 세 복음서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끼워 넣으면서 아주 정교한 문학적 대화형식으로 쓰여진 시리즈를 통해 이 관계를 설명한다. 이 대화들은 요한이 예수께서 당신의 생전에 실제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서 쓴 것이 아니라 기도 중에 일어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종종 아주 시적이고 철학적이다. 예수님은 나자렛의 목수라기 보다는 헬레니즘 문화에서 자란 교육받은 유대인 같은 인상이다. 이런점으로 미루어 이 복음서가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인 요한이 쓴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는 헬레니즘 철학자가 아니라 갈릴래아 어부 였다.(이 요한이 요한 묵시록을 쓴 것 같다. 이 묵시록은 아주 다르고 매우 유대식이다.)

그러나 고대 전통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그리스 근처의 에페소에서 자기 주위에 공동체를 모았다. 아마도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마지막 저자가 요한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 해도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의 정당성을 인정했을 가능성은 높다. 복음서의 최종 저자가 그 전체적인 틀을 형성한 것은 사랑 받는 제자 요한사도 학파의 영향이었다.

징표의 책: 주권의 징표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 복음서는 독특하게 아름다운 서론으로 시작한다:

한 처음,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요한 1,1-5)

18절까지 계속되는 이 서언은 요한 공동체에서 전례예식 때 부르던 찬송가일 것이다. 이 노래는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그들의 생각을 요약한 신학적 시(詩)이다: 그분은 세상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신 말씀이시다; 그분은 살이 되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다; 그분은 육화 하신 거룩한 빛이시며 사랑이시다.

요한은 서문에서 천지창조 때에 계신 말씀이신 하느님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나서 요한은 우리에게 7일 동안의 새로운 창조에 대해 상징적으로 말한다. 사람이 되신 말씀은 이제 세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새로운 민족을 창조하며, 공생활을 시작하는 첫째 주간에 예수님은 그와 아버지(하느님)를 믿도록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시며 그분의 주위에 공동체를 형성한다.

요한 복음서는 묘사하고 있는 사건을 자신이 아주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표현하며, 독자들이 기도와 봉사를 통해 그와 같이 깊은 이해를 할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려고 하는 상징주의 표현으로 가득 찼다. 이런 이유로 요한이 4복음서 중에서는 많은 점에서 가장 신학적이며 가장 역사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창조 첫째 날에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 소개된다; 둘째 날에 세례자 요한은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보아라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 29)라고 말한다. 다른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런 말들을 쓰지 않는데 (요한)복음사가는 두 가지 생각을 소개하려고 이들을 사용한다: 즉 예수님은 어린양처럼 보잘 것 없는 고통받는 종이며(이사야 53,6-7), 예수님은 인간을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희생된 빠스카의 어린양(출애굽 12,1-14)이라는 것이다. 이 복음서의 거의 모든 문장은 묵상할 수 있는 어떤 상징적인 것을 담고 있다.

셋째, 넷째 날에, 예수께서는 최초의 제자를 만나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신다. 표현 방법은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지만 같은 내용이며,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한다는 똑같은 주제이다.

요한은 나머지 12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를 독자들이 만들게 하여, 주말에는 제자들이 모두 그분과 함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일곱째 날에 예수님은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시작하신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의 사명의 징표이고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그분이 갖고 오시는 구원의 상징이므로 항상 “징표”라고 일컬어진다. 성서학자들은 요한 복음서 전반부 12장에 모든 기적 이야기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징표의 책이라고 한다. 이런 징표들은 어떤 사람들을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고, 다른이들은 여전히 믿지 못한 채로 있는다. 복음서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더 이상 징표를 보이지 않으시고 이미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 방식에 대해 가르치신다.

이 복음서의 또 다른 특징은 믿지 않는 이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여러 곳에서 예수님과 유대인사이의 대립이 심해서 복음서가 마치 반유대주의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나 그를 믿는 모든이들도 모두 유대인임을 안다. 그러면 과연 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유대인은 누구인가?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예수님과 유대인사이에 반목이 있을 때마다 “유대인”은 항상 믿지 않는 유대인이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유대인은 상징적이다. 그들은 고집 센 불신을 상징한다. 그들은 주님을 거부함을 상징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다른 유대인들 손에 고통을 받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그들 모두 유대인!)을 박해한 독선을 상징한다.

믿지 않는 유대인과 그 지도자들, 바리사이인들도 의식주의적인 종교를 상징한다. 요한과 그의 공동체에게 종교기관의 공허한 형식주의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오는 충만한 생명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복음서에 흐르는 대 주제 중의 하나는 종교와 관계, 생명력 없는 종교적인 행위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의 서로 다른 점이다. 요한에게 죽은 종교의 상징은 유다이즘과 그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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