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마음의 심연에서 읽는 시편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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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마음의 심연에서 읽는 시편 기도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1.3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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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6

미국 제네시의 시토 수도원에서 함께 생활하며 몇 달을 보낸 뒤에, 헨리 나웬은 그의 일기에서 이 기간동안 매일 성무일도 전례의 주기에서 사용된 시편들이 얼마나 많이 그에게 의미가 있었는지 성찰하였다. 그는 시편들이 자신 안에서 어떻게 ‘천천히 육화 되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말씀들은 천천히 내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말씀들은 사상이나 표징, 비유 그 이상이다. 말씀들은 실재하는 현존이 된다... 나는 이런 생각을 여러 번 해보았다: 내가 만일 감옥에 간다면, 내가 만일 굶주림 당하고 고통받고 고문을 당하거나 치욕을 당한다면, 상대방들이 내게 시편을 계속 봉독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싶다. 시편은 내 정신을 살아있게 지켜줄 것이다... 아마도 나는 시편 암송을 시작하여 아무도 나한테서 시편을 앗아가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는 시토 수도원 전통의 어떤 중심적인 것을 자신을 위해 발견하고 있었다. 중세 공동체에서 수련자들은 시편을 외울 것을 요구받았다. 수도원 역사 내내 시편은 기도의 대들보를 형성해 왔다. 울프스탄의 말 "semper in ore psalmus: semper in corde Christus"(그의 입은 항상 시편으로 가득찼고,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로 가득찼다)는 모든 시토 수도원의 참된 금언이다. 타라와라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수도원 원장인 마이클 캐이시는 이것을 우정이 축적되는 것에 비교하고 시간이 걸린다고 말한다:

"경험을 통해 다윗의 심정을 당신 자신의 심정으로 만들 때까지, 당신은 다윗의 시편의 의미를 결코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우정과 임시로 잠시 아는 사이, 또는 가까운 애정과 지나가는 인사말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이, 주의깊은 연구와 건성으로 읽음 사이에도 똑같은 차이가 있다."

그 다음 그는 오늘날 언어가 지닌 매끈한 정보적 기능과 비교하여 ‘시편의 꾸밈없고 구체적인 정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한다. 시편은 시로서- 독특한 뉘앙스와 리듬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넓은 이미지를 지닌, 시를 통한 기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진출처=mydigitalseminary.com

수도승은 시편들을 부분들로, 조각들로 잘라내지 않고, 전체로서 껴안는다. 회칙은 시편 전체로서 기도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베네딕도는 오늘 우리가 하는 방법으로 시편을 선택하지 않는다. 시편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 중에 하나는 우리 자신의 실체의 숨겨진 면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가 사용한 이미지에서 보면, 시편은 우리가 갑자기 우리 자신 내부의 어떤 진행과정을 그 속에서 언뜻 보게 된 거울과 같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심연 속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어떤 깊이 있는 기도도 있을 수 없다.’

게쎄마니의 수도승이자 머튼의 친구인 매튜 켈티는 1960년대에 행한 강론에서 시편의 세계로 들어가며 우리가 인간본성의 온갖 측면에 닿는다고 말했다. 그는 시편을 위험한 형태의 기도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시편에는 자주 감사와 기쁨의 노래가 있고, 즐겁고 온화한 반면, 또한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악마들, 우리 속의 갈등과 대면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시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당신 자신의 것으로 시편의 정신을 받아들일 때, 시편이 사는 것을 당신이 살고 시편이 경험하는 것을 당신이 경험할 때, 당신은 인간 본성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실체들과 곧바로 맞닥뜨리게 된다. 시편은 모두가 자연에 대한 찬가와 행진곡들이 아니다... 인간 마음 속의 어둠, 분노와 성냄, 미움과 복수, 그리고 많은 다른 불행한 기질들이 또한 있다... 시편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악마와의 많은 싸움을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다."

시편의 보편성은 그것이 엄청난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지 시편이 나에게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의 노래였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편을 매일 기도로 하고 있을 모든 수도 공동체들, 본당 사제들, 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만물은 밤을 털어버린다’는 새벽에 관한 헨리 본의 구절은, 이 연속적인 기도의 물결에 따라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시간의 경과에 대해 생각할 때 살아난다.

때로 시편은 우리에게 고뇌나 분노를 표현할 수 있게 하고, 때로 확고부동함과 자부심, 또는 감사와 즐거움을, 때로 우리가 죽을 것 같을 때 아무런 반응의 불꽃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또다른 현대의 시토 수도자인 바실 페닝턴은 우리가 시편에 접근할 수 있는 다른 차원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항상 시편작가의 말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시편을 그리스도 당신자신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데, 그 분은 매우 자주 이 시편들을 기도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분이 우리 안에서 시편들을 기도하고 시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게 하자.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 대해 말하는 시편작가의 말을 통해 시편을 듣고 그분의 기도와 찬양 속에서 그분에게 결합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시편을 기도하는 것. 오랫동안 내내 이것이 메시지이다. 매튜 캘티는 그것을 간결히 표현한다: "내 생각에, 만일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시편을 기도하지 않으면, 차라리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게 더 낫다."

시편에 대해,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에 관한 우리의 경험을 노래한다...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관상... 시편은 우리 정신을 형성하고 우리의 생각과 애정을 하느님께로 이끈다. 그러나 시편은 하느님 안에 우리를 세우고, 시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께 우리를 일치시킨다." 1955년 게쎄마니에서 수련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머튼은 시편에 깨어있도록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만일 우리가 시편의 의미에 깨어있다면 성가대에서 시편을 암송할 때에 우리는 시편의 치유능력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영감을 받은 저자들의 경험에 마음을 맞추어야 하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다시 체험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는 심오한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치유하시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그분에게 닿는 만큼’ 그분으로부터 치유를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과 만남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시편으로 간다. 그분의 말씀이 치유한다.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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