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와 통일이 사라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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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와 통일이 사라진 자리
  • 김유철
  • 승인 2017.01.31 1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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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의 Heaven's door

[김유철의 Heaven's door]

사라진 것은 단지 ‘이름’이었을까?

‘Super Rapid Train’의 약칭인 SRT고속철도가 2016년 12월 개통되었다. 2004년부터 철도수단 중 최상위였던 KTX고속철도와 선두경쟁을 다툴 것으로 보인다. 두 철도가 수많은 사람들을 보다 빠르게 실어 나르는 동안, 어쩌면 훨씬 전부터 시나브로 사라진 두 개의 철도 수단이 있었다.

비둘기호는 2000년 11월까지 운행한 완행 열차의 이름이다. 거의 대부분의 역에 정차했다. 수학여행도 이 기차를 이용한 시절이 있었다. 통일호는 조금 더 남아 비둘기호의 역할까지 감당했지만 그 역시 2004년 3월 철도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현재 일반열차로서는 무궁화호와 새마을호가 남아서 운행 중이다.

고속철도가 나오기 전 철도의 최상위는 새마을호였다. 마치 국시(國是)를 반공으로 하던 시절을 상징하는 것처럼 그 어떤 이름-비둘기, 통일, 무궁화-도 ‘각하’의 새마을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보다 빨리’라는 무언가에 쫓기는 욕구를 품은 요구 앞에 통일과 비둘기는 아예 사라졌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기차역에서 발음되던 통일과 비둘기는 더 이상 들리지도 않았고 기억되지 않았다. 과연 사라진 것은 통일과 비둘기라는 ‘이름’뿐이었을까?

사진출처=blog.naver.com/PostView.nhn?blogId

名可名非常名

노자 1장에 나오는 ‘명가명비상명’을 무위당 장일순은 “어떤 존재에 이름을 붙였을 때 그 이름은 항상 그 이름으로 있는 게 아니다”로 풀이 했다. 그것을 글로 옮긴 관옥 이현주는 “이름을 붙이면 이름이 곧 이름의 주인이 아니다”로 옮겼다.

당연한 이치로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기차 통일호와 비둘기호가 ‘통일’과 ‘비둘기’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겨진 의미가 일상에서 잊혀져 감을 못내 아쉽게 생각한다. 통일은 ‘한 때’-이젠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민족의 염원이었고,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그런 유기적 의미 위에 올라선 새마을호란 것은 ‘각하’ 혹은 ‘잘살아보세’의 상징어였고, KTX나 SRT는 영어의 약자를 넘어서서 ‘무조건 속도’란 의미와 다름 아니다.

단순히 기차 이름의 나고 드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딛고 사는, 살아가야 할 시대의 단면이기도 하다. 불가에서는 전도망상에서 벗어나 본래진면목을 찾는 것이 해탈의 상태로 이해하기도 한다. 해탈은 용하다는 도량에서 삼천 배, 오천 배 올리고 면벽기도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서서 헛된 꿈을 꾸는 전도망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문제를 찾아내지 않고 섣불리 정해진 해답을 찾고 있는 아지랑이 속에 머물 때가 허다하다. 헛수고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부활한 예수께서 아직 두려움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공동. 루가24,36)라고 한 그 ‘평화’를 교회는 받았고 세상 구성원 모두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 삶의 모습, 신앙의 모습은 예수가 주신 그 평화에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그것을 때로는 대립보다는 소통에서 찾고, 욕심보다는 나눔에서 찾으며, 눈물과 좌절이 아닌 기쁨과 희망 속에서 절감하고, 분단국에서는 통일에 평화의 의미를 온전히 담을 수 있었던 것이다.

통일은 한 순간의 일이 아니라 키워나가야 한다. 통일은 어떤 정치적 덩어리진 해결책이 아니라 어린 생명체를 보살피듯 정성을 다해서 키우는 길이 유일한 길이다. 어찌 보면 현 정부의 대북 강경책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이미 통일을 잊고 지내는, 평화를 외면하고 지내는 사람들의 마음이 곳곳에 깔린 것이 정책이 되고 집행이 된 결과일 뿐이다.

쇠귀 신영복은 <담론>에서 통일統一은 대박이 아니라 서로가 통하는 통일通一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남북이 평화로운 통일統一을 위해서는 평화정착, 교류협력, 차이와 다양성의 승인이 바로 통일通一로 가는 길이라고 제시했다. 통일의 과정은 남북이 소통하고 함께 변화하는 과정이다. 부활한 예수께서 우리에게 준 평화는 통일의 청사진이면서 동시에 21세기 문명사적 전망으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를 둘러싼 담론은 ‘평화’이기를

새해를 한 달 정도 보낸 한국교회를 둘러싼 담론은 무엇일까? 각 교구마다 발표한 교구장 주교의 사목교서는 어떤 담론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과연 그 개별적 지향점 안에 평화는 담겨있는가? 평화의 영성은 사라지고, 헛꽃 열성만 피우고 있지는 않은지? 신앙언어적 평화가 일상언어적 평화로서 교구민과 교회 외부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설날을 지나면서 다시 되새겨 봐야할 시점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주교회의를 통해서 본당마다 민족화해분과를 설치하고 분단 상황 속에서 평화를 확장하는 노력과 함께 통일을 이념이 아닌 신앙적으로 이해하고 교회의 역할을 찾고자 한 바 있다. 분명히 분단 상황 속에서 한국천주교회는 예수의 마지막 당부와도 같은 ‘평화’를 체험하고 그 체험한 바를 사회 안에서 특별히 남북의 대치상황을 변화시켜야 하는 소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해 나갈 수 있음을 자부하며 평화를 일상의 담론이 되게 하여야 한다.

본당의 벽에 걸린 구호성 평화나 책 안에 박혀있는 활자 평화로는 그 길을 갈 수 없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숱한 천주교인의 더럽혀진 이름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예수가 주신 평화를 위한 길에 많은 천주교인의 이름이 놓이기를 염원한다. 한국천주교인의 의미가 성당 가는 사람이나, 그렇고 그런 부류로 자리 매김 되지 않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공동. 마태5,9)로 불리길 기대한다.

그 날이 오기 전, 모든 기차의 이름을 비둘기호와 통일호라 부르고 싶다.


김유철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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