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힘에 저항하고 희생당하는 복음적 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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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힘에 저항하고 희생당하는 복음적 가난
  • 참사람되어
  • 승인 2017.01.2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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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되어 -5

예수님의 가난은 절름발이 가난이나 비겁한 가난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가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 죽음은 당신 혼자의 검소한 생활양식이나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 특권없는 위치의 선택 때문에 초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상 죽음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인간들, 특히 무력하고 소외되며 거부되는, 사회가 보잘것 없이 대우하는 사람들 편을 듦으로서 필연적으로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고 있는 구조적 가난과 인위적인 고통을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정당화시키고 있는 집단과 제도에 의해 하느님 자신이 온통 무참히 부서진 가난이었습니다.

혼자서 실천하는 가난, 그것은 복음적 가난의 반쪽일뿐이며 따라서 절름발이 가난입니다. 혼자서 생활양식만 검소하게 실천하는 가난, 그것은 이기적이며 개인적인 사치와 낭비가 극대화되어 체계적으로 또한 장기적으로 합리화되고 있는 제도적 가난앞에서 맥을 못추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검소한 생활방식에 자족하고 도취해 있는 폐쇄적이며 비겁한 가난입니다.

악에 의해 희생당하는 예수님의 복음적 가난은 구조적 가난에 대항하는 하느님의 방식

철저하게 권력과 부라는 우상에 의해 희생당하신 예수님의 가난은 그 우상과 싸우시는 하느님의 최고의 방식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적 가난은 현실속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악과 우상의 자취를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파악하며 그 위력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 편에 서며 그들과 함께 맞서 대항하는 가난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탐욕을 없애는 마음의 가난, 정신의 가난은 이러한 적극적인 가난, 연대하는 가난, 맞서 싸우는 복음적 가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가난은 연대하는 가난으로 이어질 때에만 비로서 총체적인 따라서 참으로 복음적인 가난이 되는 것입니다.

야훼의 고통받는 종이신 예수님은 철저한 무력함으로 극대화된 권력과 대립하고 그 결과로 온전히 파괴되심으로서 그 권력을 이기셨습니다. 이런 가난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가난이며, 따라서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 개개인과 그들의 공동체, 집단이 선택하고 실행해야 할 가난입니다.

현재 우리는 어떤 가난을 선택하고 있으며,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

엄청난 구조적 가난과 불의한 제도, 정책을 앞에 두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 가난은 아마도 마음의 가난에만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조금 더 발걸음을 떼었다고 한다면 환경보존운동, 반공해운동의 실천방법으로 지나친 낭비를 줄이는 검소한 생활방식의 가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 수도자들이 경제적으로 더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운동도 시작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 필요한 행동입니다. 또 검소한 생활을 한다는 것조차 현대의 상업주의적이며 소비주의적, 물질주의적 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는 매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인차원의 검소한 생활방식은 대부분의 경우 개개인에만 그치고 그 개인이 속한 단체나 조직, 기구, 공동체의 생활방식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수도자가 가난하게 살아도 그 수도자가 속한 수도회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본당의 신자 개개인은 넉넉치 않을지 몰라도 본당 살림 자체는 결코 검소하지 않습니다. 돈이 넉넉하고서야 마음의 가난, 탐욕을없애는 정신적 가난이 실현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불가능한 논리입니다.

검소한 생활 실천은 구조적인 가난, 제도적인 가난에 도전하지 않고도, 아니 오히려 그 강요된 가난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 살살 피해가면서도 얼마든지 실천될 수 있습니다. 돈이 어떻게 모여졌는지, 부와 권력이 어떻게 축적되었는지 그 경로와 방법은 생각치 않고 가진돈의 양만 줄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가난이 현재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마음의 가난, 검소한 생활 양식이 아닐까요 ?

개인의 생활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제도의 변화가 병행되는 가난 실천을

진정으로 마음의 가난이 실천된다면, 즉 우리의 탐욕이 제대로 줄어들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속한 제도나 조직자체도 우선 경제적으로 가난해져야 합니다. 검소한 생활방식이 축적된 부의 경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실천하는 가난이라면 불의한 제도나 조직의 변화를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행동하는 가난이어야 할 것입니다.

제도나 조직, 정책의 변화가 개개인의 검소한 생활방식, 마음과 정신의 가난 실천과 동시에 병행되지 않는다면 이런 작은 씨앗들은 얼마 가지 못해 질식해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작은 사람들, 절망의 극한 상황속에서도 인간과 삶에 대한 신뢰, 희망을 놓지 않은 사람들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나 조직,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소위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기피하고 있습니다.

왜 개개인은 검소한 생활을 좋아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말하거나 조금씩 실천하고 있지만, 그들이 속한 기구나 조직은 경제적으로 따라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인 삶의 모든차원에서 가난해지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권한을 더 많이 부여받은 이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성실치 못한 이행에는 여러가지 이유와 변명이 가능합니다. 또 책임자들 조차 그런 권력과 부의 제도적 희생자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아느 누구에게도 책임이없는것 같습니다. 제도나 조직 자체를 야단치고 스스로 변해라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진정 그럴까요 ?

복음적 가난은 가난한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만 실천 가능

돈의 양을 줄이는 가난이 아니라 돈을 많게 하는 제도를 변화시키는 가난을, 돈의 힘으로 그럴싸한 말과 말쟁이들을 만들어내어 말만 무성하고 체면만 세우는 가난이 아니라 말없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가난을 선택하고 실천합시다.

혼자서 실천하는 검소한 생활양식의 가난뿐 아니라, 구조악과 대항하여 싸우는 가난을 실천합시다. 악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악의 희생자가 되어 구원과 해방을 가져오시는 하느님의 가난방식을 우리의 가난방식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입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여러가지 힘으로 싸울 수 있는 만큼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종적이며 가장 강력한 저항방식은 바로 철저하게 악의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희생자가 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적 가난을 가장 가깝게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난은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힘에 의해서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난일 것이다.

악에 저항하고 악에 희생됨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영을 기다리며

하느님의 오심을 충실히 기다리며 가난을 실천했던 예수님의 여인들, 하느님의 영을 편견없이 느낄 수 있었던 복음의 어린아이들, 일하시는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들인 노동자들, 그리고 악의 완전한 희생자가 되었던 광주의 의로운 시민들. 이런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숨쉬며 살고 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악과 싸우고 마침내 악의 희생자가 되는 복음적 가난의 실천은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복음적가난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부추시기 때문입니다.

출처/참사람되어 199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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