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니묄러 "우리는 어떤 신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가 히틀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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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니묄러 "우리는 어떤 신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가 히틀러인가?"
  • 로버트 엘스버그,임선영 역
  • 승인 2017.01.09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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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일 출생, 독일 고백교회 목사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체포할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이 가톨릭 신자들을 데려갈 때도 나는 침묵했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찾아왔을 때도 나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 다가왔을 때, 나를 위해 말해줄 이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oeller, 1981-1984)는 1920년대에 <U 보트에서 설교단까지>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써 유명해졌다. 그리스도인으로써 양심에 대한 거듭된 성찰을 통해 이후 책 제목은 여러 번 바뀌었으며 최종적으로는 <U 보트에서 설교단, 감옥 그리고 평화주의자에 이르기까지>로 출판되었다.

니묄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유능한 사령관으로 U 보트에서 복무하였다. 당시 U 보트 승선 장병들의 전사율은 매우 높았기에 생존자들은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다른 독일 장병들과 마찬가지로, 니묄러 역시 패전으로 배신감을 느꼈으며 베르사유 조약의 항목들은 독일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종전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루터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뒤에도, 조국 독일은 언젠가 그 진가를 보이리라 기대했다. 그랬기에 처음에는 민족 사회주의를 지지하며 히틀러가 약속한 독일의 영광을 되찾을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은 1933년, 히틀러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나치의 혐오스러운 극단주의에 회의감이 들었다. 나아가 소위 '게르만 그리스도교 운동'(German Christian Movement)을 반대했다. 이 운동은 사실상 나치즘과 복음을 동일시하려는 시도였다. 명망 있는 교회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거리낌 없이 이에 동참하였으며 니묄러에게는 비난이 쏟아졌다. 

니묄러는 교회는 정치적 통제를 받지 않아야 하며 자유와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 독일 그리스도교가 그랬듯, 그 역시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며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부했기에 벌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러한 입장이 매우 위험하다고 인지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나치가 "인종"이라는 측면에서 유대인들을 처벌해야한다는 주장에도 강하게 반대했다.

반유대법이 적용되면서 세례받은 그리스도교 목사일지라도 아리안인이 아니라면 처벌받게 되자 나묄러의 입장은 확고해졌다. 그는 이러한 기준이 결국 교회의 소멸을 가져올 것이라 예상하고는 2,300명 목사들의 서명을 받아 아리안 법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니묄러가 조직한 목사긴급동맹(Pastor's Emergency Committee)은 이후 이른바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로 발전하였으며 칼 바르트(Karl Barth)와 디이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도 뜻을 함께 했다.

고백교회 운동은 1934년 시작되었는데 교회가 민족 사회주의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면한 역사적 상황을 "고백의 순간"이라고 명명하고 진정한 교회가 되기 위한 질문에 답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떤 신을 믿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인가 히틀러인가?"고 물었다. 몇 년 후 고백교회는 박해를 받게 되고 이에 동참한 목사들은 체포되어 수감되거나 추방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니묄러는 1937년 7월 1일 체포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정치적 자유가 인정되었기에 전국의 교회가 체포에 항의하는 의미로 종을 울렸다. "국민의 불편을 초래하고 국법과 법령에 반하는 반역을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전쟁 영웅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는 없었다. 히틀러는 이에 분노하여 판사들을 해임하고 니묄러가 "개인 죄수"로 강제수용소에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니묄러는 베를린 북쪽 작센 하우젠 수용소로 보내졌다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다하우로 이송되어 1945년 연합군이 진격해 올 때까지 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니묄러는 전쟁 중에도 애국심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나치의 만행을 알게 되면서 차츰 태도가 변했다. 자신도 고초를 겪었음에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1937 체포되었기에 이후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체포 이전 나치에 반대하는 발언을, 특히 유대인들을 위한 항변을 하지 못했다며 용서를 구했다. 모든 사람들이 박해받던 그 시절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나를 구해줄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물었다면 안타깝게도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고 인정했다.

나치의 잔학행위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결별하고 교회의 죄를 고백하는 선언문의 초안 작성에 참여하여 반유대주의를 조성하고 지지했던 그리스도교의 역할을 인정했다.

하지만 여기서 니묄러의 고백이 끝나지 않았다. 군 복무 경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으나 원폭 이후 입장을 바꿨다. 수소폭탄이 가진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알게 된 후 집으로 돌아가 산상수훈을 다시 읽고는 더 이상 무력 사용을 정당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가 쓴 윤리적 원칙에 대한 기준에 따르면 이 일은 매우 쉽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단순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면 된다.

1950년대 이후에는 국제적 평화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흔 살이 넘도록 전 세계를 여행하며 핵전쟁의 위험을 알리며 평화와 인권 향상을 위해 힘썼다. 마르틴 니묄러는 1892년 1월 14일 태어나 1984년 3월 5일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번역: 임선영 아우구스티나
원문 출처: <모든 성인-우리시대를 위한 성인, 예언자, 증인들>(All Saints), Robert Ellsberg, crossroad, 1997, p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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