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토회] 까까머리 수도승과 턱수염 평신도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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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까까머리 수도승과 턱수염 평신도 형제들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1.09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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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3

자신들의 신앙생활로 널리 알려진, 이 범상치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입은 옷 색깔에 따라 하얀 수도자로 알려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들지 않은 천연 양털로 된 양모로 천사처럼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 옷은 그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는 갈매기 떼처럼 보이고, 아주 하얀 눈을 걷고 있는 것처럼 빛이 난다.

리보의 수도승 월터 다니엘이 '하얀 새의 무리들'이라고 아주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첫번째 시토 회원들은 거의 유례가 없는 방법으로 유럽전역에 이주하였다.

아마 1120년쯤에 쓰여졌으며, 수도원의 시작을 역사에 남긴 문서인 보잘것없는 시작(Exordium Parvum)은 힘차게 울려 퍼지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 교회의 첫번째 창립자들인 우리 시토회의 수도자들은 누구의 중재로 또한 어떤 상황 속에서 수도원과 우리들의 생활 방식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이 문서로써 우리들의 후임자들에게 알린다.’

상징적인 사막으로 들어감

시토 회원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수세기 동안의 모든 개혁자들처럼 그들이 주류의 전통을 떠나는 이유가 더 진실하고 더 올바른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 것을 다시 얻고자 함이며 - 그들의 경우 그것이 베네딕도의 규칙에 따라 사는 삶임을 설명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토회의 시작은 1098년 모레스메스의 수도원장인 로베르트와 21명의 수도자들이 실제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사막으로 돌아감을 의미했다.

그들은 시토라고 알려진 황야를 향해 열심히 떠났는데, 그곳은 사람들이 거의 들어가지 않고 단지 야생동물들만 사는 샬론교구 내의 지역이라 수림과 가시덤불이 무성하게 덮여있었다. 하느님의 사람들이 거기에 도착해서 평신도들에게 덜 매력적이고 더 접근할 수 없는 위치일수록 자신들에게 더 어울린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때, 그들은 촘촘한 덤불 숲을 베어 정리한 뒤에 수도원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프랑스 부르군디 지방에 있는 디종의 남부 삼림지대의 늪지대 개간지에 정착하였고 모원(母院)뿐만 아니라 다른 수도세계와도 구별하기 위해 시토의 첫 번째 집을 새 수도원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수도자들은 사막의 온갖 엄격한 요구들을 경험했다. 만일 우리가 시토 수도자들의 카리스마를 온전히 경험하거나 이해하려고 한다면, 실제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사막이란 장소가 아주 적절한 곳이다.

‘사막의 목소리, 사막의 축복을 깊이 생각하라’라고 대림절 강론에서 이그니의 게릭이 말하였다; ‘사막이 너를 먹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막으로 예수를 따랐던 군중들을 생각하게 하며 계속 하였다, ‘그리고 훨씬 더 자주 그리고 더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분은 사막으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이고 너의 목적이 훨씬 더 거룩하기에 섬김도 비할 길 없이 더 기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자들에게 사막의 교부들인 바실, 캐시안에 대해 더 많이 읽으라고 말하면서, 베네딕도가 겸손하게 지칭한 그의 <초심자들을 위한 작은 규칙>의 마지막 장에서 말하였던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모델은 단순함과 엄격함의 삶을 살기 위해 이집트의 사막으로 사라진 안토니오 성인의 모델이거나, 거의 영웅적인 정도의 금욕주의를 가르쳤던 캐시안의 모델이다. 시토는 12세기의 금욕주의자들이 사는 사막이었고, 앙드레 로페가 설명하듯이 수도원과 사막 사이의 유사성이 시토 수도자의 생활방식으로 계속 되었다.

수도원, 사막처럼 하느님 안에서 만들어지는 우주

영혼이 가장 갚은 영감을 가장 자주 받는 곳은 사막이다. 사막에서 하느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만드신다... 그러므로 수도원은 일종의 예언적인 장소, 다가올 세계에 대한 예상, 하느님 안에서 다시 만들어지는 우주에 대한 영원한 선언, 그 양극에 애덕과 하느님에 대한 찬양이 있는 우주를 선언하는 곳이다.

물리적이고 영적인 요구에 덧붙여 초기 사람들은 잇단 역경을 보았다. 첫 번째 수도원장은, 돌아오라는 교황의 권고에 복종하여 형제들의 절반을 함께 데리고 갔다. 남아있던 형제들은 처음에는 알베릭 수도원장, 다음에는 셔본의 외딴 수도원에서 소년시절을 지낸 영국인 스테판 하딩 아래에서 가난, 금욕, 그리고 질병을 버티었다. 그러나 결국 새로운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냈고, 이 사람들 중에는 아저씨, 형제, 사촌과 조카들로 구성된 대부대를 끌고 도착한 베르나르드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이 그 공동체뿐만 아니라 시토회 전체의 전환점이 되었다. 4년 내에 스물다섯의 나이인 베르나르드는 클레르보의 본부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몇 년 내에 프랑스에 있는 최초의 수도원들 뿐만 아니라 유럽전역에 걸쳐 새로 설립한 수도원에 사람들이 수백 명 몰려들었다.

베르나르드의 영적 카리스마

수도원의 범상치 않은 성공이 얼마나 베르나르드의 인격에서 기인됐는가 하는 문제는 끊임없는 토론의 문제가 되었고 그의 존재로 인하여 얼마나 더 많이 시토회가 확장됐는지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자신이 베네딕도회 수도승이자 수도원의 역사에 관한 연구로 널리 알려진, 데이빗 노울스는 베르나르드가 없었다면 수도원이 아마도 반 정도의 크기로 꽤 축소되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무릅쓴다.

베르나르드는 거의 압도할 수 없을 정도의 비범한 인격적인 매력과 영적인 힘이 섞여있고 카리스마가 강하며, 지도자, 작가, 정치가였다. 1153년 그가 죽었을 때, 339개의 수도원들이 있었는데, 그중 시토에서 그가 직접 설립한 클레르보 수도원이 68개를 세웠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91개가 생겨났다.

영국에서 하얀 수도승들의 첫 번째 정착은 1128년 써리지방 위버리의 상대적으로 외진 곳이었다. 참으로 중요한 순간은 시토의 자원(子院) 수도원이 1132년 리보에 설립된 것이었고, 몇 달 뒤에 원천의 핵심을 형성하기 위해 요크에 있는 성 마리아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일단의 개혁가들의 이주가 이루어졌다. 그 후 이십년 동안 성장은 신속히 계속되었고 1152년 주로 영국북부에는 40개의 시토 수도원이 들어서 있었다.

약 1140년에 베르나르드는 서웨일즈에 이주단을 보냈는데, 그들은 마침내 위트랜드에 정착하였고 오늘날 그곳에는 또다시 여자 시토 수도자의 공동체가 있다. 위트랜드와 자원 수도원인 스트라타 플로리다는 부유했고 웨일즈의 권세 있는 집안의 청원자들에게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더 많은 수도원들이 북웨일즈와 아일랜드에 만들어졌다.

시토회, 교황청보다 더 효과적인 국제조직...평화의 장소

이 증가하는 숫자들은 그들을 함께 결속시키는 단순하고, 강력한 조직의 형성을 요구했고, 스테판 하딩은 이것이 마주쳐야 할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는 깨끗한 마음을 가진 정치가였고 비록 그가 <사랑의 헌장>(The Charter of Charity)을 실제로 쓰지 않았다 해도 의심할 바 없이 이 문서는 수도원을 위한 그의 비젼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권위를 가진 굳건한 일련의 입법체계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모든 대수도원장들을 위한 헌장과 제휴와 방문에 관한 간단한 체계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규정이 있는데, 이것은 외부간섭으로부터 분리되고 교회와 세속의 권위로부터 자유롭게 수도원의 내부감독을 위한 철저한 체계를 가져오게 되었다.

선도적인 중세사 연구가인 리챠드 서든경은 이 체계를 중세 설계도의 역작이라고 불렀다. 일거에 시토 수도자들은 유럽에서 교황 조직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인 첫 번째의 국제적인 조직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수도원이 더 협소한 목표와 더 작은 적용지역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토회 수도자들이 자신들 주변의 봉건 사회의 어떤 속박이나 구속의 형태에서 풀어지면서 얻게 된 자유가 특히 중요했다. 그들은 또한 세기를 거쳐 베네딕도 수도원들 주위에서 자라왔던, 처음에는 본래 선한 것들이 이제는 족쇄나 짐이 되어버린 다른 부착첨가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따라서 그들은 교육을 받기 위해 수도원에 와서 공동체 안에서 그들의 초기 삶을 보내는 어린이 제3회원들이 필요 없게 되었다; 평신도 후원자들을 위한 장례예식이 사라졌다; 더 이상 유물들에 대한 공적인 숭배, 순례, 군중들이 없게 되었다. ‘세상 속에서 사는 다방면에 걸친 긴장과 충돌로부터 해방’.

머튼은 초기 시토 수도회 수도원들을 바깥세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쾌락과 권력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인간 본성을 더 인정했던’ 거대한 봉건 수도원들과 현저하게 대조적으로 질서, 조화 그리고 평화의 장소로 보았다.

시토 여자 수도회의 출현

처음에 그 운동은 남성들의 운동이었고, 비록 개별적인 시토 수도회들이 여성들의 소명을 북돋았지만 전체적으로 남자수도회들은 시토 여자수도회에 관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1190년대에 수도회 총회는 시토 수도회가 되려고 하는 수녀원들의 요구에 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고 1213년에 이 수녀원들은 이웃 수도원들의 후견아래 있게 되었다.

공식적인 태도는 여전히 시원치 않았지만 그러나 결국 27개의 영국 수녀원이 시토 수도회가 된 것은 여성들의 끈질김의 승리였고,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도 수녀원들은 시토 총회의 관례에 따라 지역 총회를 개최하는 선까지 시토 수도회의 관례를 따랐다. 최근의 연구는 예를 들면 나자렛의 베아트리체와 같은, 시토회 여성들의 몇몇 저작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시작하고 있으며 의심할 바 없이 연구가 더 진행됨에 따라 더욱 더 많은 이름과 업적을 알게 될 것이다.

머리 박박 깎은 수도자와 턱수염 기른 평신도 형제들

평신도 형제들은 시토회 수도원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었다. 이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완전히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공하였다. 더 기름지고 비옥한 자리들은 이미 주인이 있었기 때문에 시토 수도자들이 받은 재산의 선물은 일반적으로 주변의 땅이었다.

시토 수도자들이 임차인이나 농노를 두는 것을 거부하였고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산림이나 불모지로 된 이 커다란 황야지대는 문제들을 제공하였다. 작은 시작(Exordium Parvum)이 우리에게 매우 기쁘게 말한 것처럼, ‘신입회원들은 뇌와 근력의 운동에 의해 그들 자신을 위해서나 회칙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라는 부유하고 가난한 손님들을 위해서 마련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함께 토론하였다.’ 그들은 결정을 하였다.

그들의 주교에게 승인을 얻어 턱수염을 기른 평신도 형제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그리고 수도자라는 신분을 제외하고는 평신도형제들을 삶과 죽음 때에 똑같이 대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또한 고용된 일꾼을 두기로 결정하였다. 그런 도움이 없이 그들은 밤에도 낮에도 회칙의 가르침을 완전히 준수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수도승들과의 구별을 강조하기 위해서 평신도 형제들은 수수한 턱수염을 길렀는데 길이가 손가락 두 개 이상을 넘지 못하였고, 반면에 수도승들은 면도를 깨끗이 하거나 머리카락을 박박 깎았다. 평신도 형제들은 색깔과 재단이 다른 기본적이고 단순한 겉옷을 입고 허리띠를 띠고, 양말과 신발을 신었으며, 특정한 일을 위한 여벌 옷-추운 날씨에 바깥에서 있어야 하는 목동과 양치기들을 위한 가죽옷과 대장장이를 위한 벙어리장갑이 주어졌다.

이 평신도 형제들은 책을 읽을 수 없고 글을 모르는 농부들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가축상인의 협력자에 관한 매력적인 다음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렇다고 그들이 타고난 지혜나 자연적인 문화-또는 신앙의 감수성이 전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도원에는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가축상인으로 일했던 또다른 형제가 있었다. 한번은 잠 속에서 기둥의 다른 쪽에 그의 옆 가까이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매우 기쁜 환시를 보았는데, 그분은 부드러운 손에 가축을 모는 막대기를 들고 그와 함께 소들을 몰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직후에 그는 병이 걸렸고, 자리에 누워 고통과 괴로움의 육일이 지난 뒤 생애를 끝맺었다.

수도승이 이야기한 환시에 대해 조용히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가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베르나르드 형제는 몹시 기뻤고 자신감 있게 그 형제가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하느님이 그의 옆에서 일했기 때문에 그분의 무한한 연민이 너무나 공손하게 들판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그 종을 마지막 고통 속에 내버려 둘 수 없었으므로, 그를 데려가셨던 것이다.

이것은 이 초기 시대에 이름이 알려졌거나 이름이 없는 단순한 수도승들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모아 편집된 이야기들의 모음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사람들은 양이나 벌이나 포도를 돌보는 수도자들의 손노동에 관한 지식을 가져다 준 사람들이었다. 수도원에 합류했을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숙련된 장인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학에 특별한 기술들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수로 건축에 전문가들도 있었다. 그들의 상업적 전문지식은 지역의 장날과 시장에 공동체를 위해 농산물, 특히 양모를 팔아야 하는 흥정에서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중세, 역동적이고 정열적인 시대

거의 공격적인 토지의 식민지화, 광대한 확장, 지적인 활력, 새로운 기관들의 창설 속에서 시토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탄생을 목격한 그 세기와 대단히 크게 어울렸다. 그것은 마치 유럽이 중세시대에 잠이 든 이후 다시 활력을 찾은-또는 빛의 인도를 받은 것과 같았다. 12세기는 활기와 정열의 시대로 모든 방향에서 그 경계를 확장하고 있었다.

후에 유럽의 거대한 대학들이 출현하게 된 학교에서 새로운 배움의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종종 12세기의 르네상스라고 불리워졌다.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그리스, 로마시대의 작품들의 번역들이 처음으로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고, 논리적인 분석과 이성적인 토론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교류되는 생각들을 듣기 위해서 방랑하는 학자들이 그 시대의 다른 모든 대가들을 찾아다녔다. 실제 세상에서는 새로운 능력과 기술들이 발전되고 있었다.

주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전쟁은 없지만 모든 방향에서 흥미로운 시도들이 일어나는 12세기는 사람들을 깨어있게 만드는 역동적이고 정열적인 시대였다. 그러므로 12세기가 자신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정체성을 추구하며 수도회들을 흔들어 놓는 시대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시토 수도자들은 새로운 형식의 수도생활을 개발하거나, 1050년도와 1200년도 사이에 인구가 배가되어 출현한 새로운 계급들과 새로운 이해들의 요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유일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수세기 동안에 처음으로 다른 많은 종류의 삶에 대한 여지가 생겨났다. 우리는 한 집 안에 있는 ‘많은 방’처럼, 다른 형태와 질서들 속에서 다양한 성장을 본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분야들이 문을 활짝 열었고 지평선이 넓혀졌다. 낙관주의는 엄청났다: 그들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거인들보다도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개혁수도원 운동의 진리를 향한 열정...사랑은 회칙의 중추

당대의 지성의 부흥에 의해 영향을 받았지만, 스콜라학자들의 이성적 접근과는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시토 수도자들은 고대의 원본들을 신선하고도 살아있는 책들로 여기며 공부하였다. 따라서 시토 수도자들은 그들이 믿듯이 이상적인 수도생활의 원천인 베네딕도의 회칙으로 되돌아갔다.

염색하지 않은 하얀 천의 옷까지도 시토 수도자들이 느끼기에 잃어버리고 있었던 원래의 순수한 수도원의 비젼으로의 복귀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하였다. 회칙에 대한 참된 이상의 회복과 자신들의 소명에 대한 충실함은 타협이 없고 보류가 없는 진리를 의미했다. 시토 수도자들의 진리를 향한 이 열렬한 갈망은 시토 수도원 개혁의 실질적인 심장부였고, 그들은 삶의 모든 단계에, 때로는 과도하게 이 갈망을 적용하였다.

스테판 하딩은 자신의 성서 라틴어 개정판을 만들면서, 원본상의 난해한 점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랍비의 학자들과 의논하였고, 그가 최초의 원본들이라고 생각하는 그레고리안 응답성가와 암브로시안 성가의 원본들을 복사하기 위해 몇몇 수도승들을 알프스를 너머 밀란으로 보냈다. ‘그는 하느님이 실제로 계시하셨던 것을 그의 수도승들이 노래한다고 확신하고 싶었다.’

이런 모든 움직임의 중요한 추진력은 그들이 회칙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회칙 자체의 본질을 살고 싶어하는 그들의 올곧은 소망이었다. 베네딕도는 아무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말했고, 이제 시토 수도자들은 사랑의 그 복음을 문자 속에서뿐만 아니라 정신 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직접적인 실체로 만들기를 원하였다.

사랑은 회칙의 중추이고, 시토 수도자들은 회칙 서문의 시 45-7에서 베네딕도가 말한 대로 수도자는 사랑을 성장시켜야 하며, 단지 훌륭한 활동 수도회에서 사랑을 유지하거나 간직하려고만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중심 구절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시토 수도자들이 사랑의 헌장에서 설명하였듯이, 그들은 ‘그 목표가 오로지 사랑이며... 우리가 하나의 사랑, 하나의 회칙에 의해 일치되어 살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사랑의 헌장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시토 수도자들의 삶의 본질은 그리스도 자신

호이랜드의 길버트가 수녀원에서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하였을 때 그는 사랑을 우리가 늘 돌아가는, 익숙하지만 아직껏 언제나 새로운 기초라고 말하면서 시작하였다:

"당신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들으려고 소망하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새로운 소식이 없습니다
사랑이 당신을 다시 새롭게 하리라는 것 외에는.
이 계명은 내가 당신에게 주는 새로운 소식입니다;
당신에게 알려드릴 것이 더이상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시토 수도자들의 삶의 본질은 그리스도 자신이고, 만일 베르나르드가 특유의 시토회의 논리로 지적하였듯이, 그리스도 육화된 말씀이 그분의 삶, 수난, 죽음과 부활의 모든 것을 통하여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면, 수도자들 또한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사셨던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삶은 가난하고 주의를 끌지 않았으며, 고난과 노동과 노고의 삶이며, 물론 순전히 경제적 필요에서가 아니라 무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용했던 삶이었다.’

남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순한 사람의 자아에 상처였고, 그렇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손으로 하는 일의 자리를 되찾기를 원하였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가난할 수 있고 손노동에 의해 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참된 수도자가 살아야 하는 길이라고 회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레드는 농부처럼 일하는 기사와 귀족들을 보고 감동하였다:

이상주의로 회심...귀족도 노예처럼 일하고 

우리는 회심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세속을 버리고, 마치 자신들이 정말로 노예들인 것처럼, 빵을 손의 작업으로 얻는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하여 칼과 창을 버리는 귀족계급을 주시하고 있지 않는가?

알레드가 리버스비까지 그와 동행한 형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어렵게 보여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의심에 여지없이 삶이 지나치게 어려운 것을 발견하였을 때 알레드는 자애로운 눈으로 동행한 형제를 계속 주시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나에게는 성미에 맞지 않았습니다. 매일 허드렛일과 내 주변 모든 것이 나를 참지 못하고 안달나게 하였습니다. 긴 밤기도는 나에게는 고통이었고, 나는 종종 손노동 때문에 쓰러졌으며, 음식은 입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쓴 쑥 보다도 더 쓰고, 그리고 거친 옷은 살을 뚫고 실제 뼈를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너머, 가난이나 단순함의 어떤 외향적인 표현 너머에 그 목표가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은 수도자를 양성하는 이상적인 삶이 놓여 있다. 1951년 머튼이 켄터키주 게쎄마니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을 때(수련장으로 있을 때 그의 밑에는 젊은 사람들이 아직 훈련 중에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어떻게 ‘매일매일, 수도원 생활의 일상적인 시련들과 어려움들 속에서 이러한 인내가 우리를 십자가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지’를 그들에게 말하였고,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지혜, 그리스도의 모범,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꼭 매달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체 시토 수도자가 가는 길의 목표는, 베네딕도도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 그분자신이다. 알레드가 그의 수도승들에게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주님으로 계시고 우리 안에서 순례자가 되시기 위해, 우리는 그분의 죽음 속에서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의 부활을 통해 그분 속에서 새로 태어나야 한다."

‘우리의 영광스러운 스승’-초기의 시토 수도자들은 베네딕도의 회칙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소망에 의해 자극을 받았다. 자신의 축일 강론에서, 베르나르드는 "우리의 안내자, 우리의 스승, 우리의 입법자... 나는 그분에 관한 생각만으로도 기쁨과 위로를 얻게 된다"고 베네딕도를 회상하였다. 알레드는 그의 공동체에게 베네딕도가 그의 회칙으로 법을 세웠다고 말하였다,

"그것을 주목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땅인 천국 그자체에 들어가서 영원히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회칙에서 베네딕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감실을 우리 마음 안에 만들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법을 준수한다면 그 자신이 말한대로, 우리는 천국의 상속자들이 될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 "그는 현명하게 살았고 하느님 안에 살았다"

우리는 단순한 삶-복음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 사랑과 분별력을 가지고 그의 수도승들을 지도하는 지도자이고 교사였던 베네딕도 성인의 축일에 매년 그들의 공동체들을 일깨우는 수도원장들에게서 나온 이와 같은 많은 강론을 가지고 있다. 머튼은 특히 이그니의 게릭의 네 가지 강론에 신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는데, 이 강론들은 특이하게 흥미로운 것이었다.

베네딕도는 현명하게 살았고 하느님 안에 살았다. 그는 우리를 위한 모범일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고, 따라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현명하게 산다면 우리는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다. 게릭은 베네딕도를 하느님 지혜의 생명수에 의해 심어진 나무에 비유하였다. 우리 역시 하느님 지혜 속에 우리의 뿌리를 담그는 만큼 행복하다. 뿌리의 개념은 안정성의 중요성을 드러내고, 베네딕도는 그것을 수도 서원에서 첫째로 두는데, 다른 모든 것을 위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열매와 안정성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고, 만일 그의 공동체에 자신의 뿌리를 담그지 않으면 수도승은 아무도 사랑 안에서 성장할 수 없다. 우리가 시간을 주고 침묵을 지킨다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없다고 보는 겸손함을 가지면, 지혜의 물에 의해 심어진 나무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베네딕도에 관한 강론 중에서 알레드는 그를 모세와 같다고 말한다: ‘축복받은 모세의 모범을 따라, 축복 받은 베네딕도는 가서 “멀리멀리 광야로 가서 고독 속에 살았다”(시편 54,8)’ 하느님은 그곳의 덤불과 불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덤불 속에는 가시들이 있었는데, 알레드는 수도자들에게 불, 열 그리고 광채 속에 세 가지 표징들이 있다고 말하였다:

"가시들 속에서 우리는 유혹을 봅니다,
열, 사랑 속에서
그리고 광채 속에서 우리는 관상을 봅니다.
유혹은 연민을 가르쳐 줍니다.
사랑은 고독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내 자신을 안전하게 맡길 수 있습니다.
관상은 신중함을 가르쳐 줍니다.
가장 많이 축복 받은 아버지 베네딕도,
당신은 유혹 속에서
‘나의 연약함에 연민을 갖게 되는 것’을 배운 사람(히브 4,15)입니다.
사랑의 불로타고 있는 당신은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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