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하느님께 대한 거룩한 그리움은 '적당주의'와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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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하느님께 대한 거룩한 그리움은 '적당주의'와 상관없다"
  • 교종 프란치스코
  • 승인 2017.01.0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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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1월6일 주의 공현 대축일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6일 주의 공현 대축일(한국교회는 1월8일 주일로 이동경축)을 맞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봉헌된 미사 강론에서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은 믿는 마음에서 흘러나온다며 이러한 믿는 마음을 간구하자고 강조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먼 곳에서 온 동방박사들은 이 말을 통해 그들의 기나긴 여행의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새로 태어난 임금을 흠숭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과 흠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에서 강조되고 있는 두 가지 행위입니다.

우리는 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흠숭하고자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발걸음을 시작한 동기가 되는 별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발생한 일상적이지 않은 어떤 것을 발견한 것은 셀 수 없는 사건들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별은 배타적인 의미에서 빛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특별한 유전자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어떤 교부가 잘 이해했듯이 동방박사들은 걸어가다가 별을 본 것이 아니라 별을 보았기 때문에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그들은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기에 지평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이 알려주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로움에 열려 있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열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동박박사들은 그런 방식으로 신앙인의 초상화를 표현하고 있고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을 지닌 인간의 초상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본래의 집, 천국에 대한 그리움을 목말라하는 사람의 초상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생에서 마음을 마비시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거룩한 그리움은 믿는 마음속에서 흘러나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그저 과거의 어떤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거룩한 그리움은 인생을 초라하게 만들고 축소시키는 모든 시도들 앞에서 우리가 열린 눈을 지니도록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거룩한 그리움은 기억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실패한 많은 예언자들 앞에서 항거하는 믿음에 찬 기억입니다. 이러한 그리움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희망을 생활하도록 유지시켜주는 그리움입니다.

주간을 거듭하면서 ‘오서소, 주 예수님’하고 간구합니다. 이 그리움은 나이든 시메온을 성전에 매일 가도록 했던 것이고 그는 자신의 인생은 구세주를 자기 팔에 안아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 그리움은 잃었던 아들로 하여금 잘못된 생활을 떠나서 아버지의 품을 찾아 나서게 했던 그리움입니다. 이것은 목자가 잃어버린 어린양을 찾아서 아흔 아홉 마리를 나두고 찾아나서는 마음이고 무덤으로 주일아침 일찍 스승을 만나러 달려갔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체험했던 그리움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은 우리를 가두는 둘레를 벗어나도록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사실 그런 둘레들은 아무것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들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은 적당주의를 깨는 태도이고 우리가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 변화를 위해 노력하게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은 과거 안에서 두 가지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미래를 향해 나갑니다.

신앙에 의해서 고무된 ‘갈망하는’ 신앙인은 동방박사들처럼 역사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느님을 찾아 나섭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주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변으로 가서 아직 복음화되지 않은 곳을 대면하며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는 우월감을 지닌 태도로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기쁜 소식은 아직도 울려 퍼져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이의 눈을 무시하지 않는 구걸하는 사람과 같이 합니다.

베들레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의 헤로데의 궁전에서는 이와는 반대되는 태도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 예루살렘은 잠자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찾기보다 잠자고 있었습니다. 무디어진 양심의 마취 상태에서 잠자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혼란 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했습니다.

역사를 변혁시키는 새로움 앞에 놀란 그는 자기 자신 안으로 움츠려들고 자기의 성공, 자기의 생각, 자기의 계산속에 빠집니다. 다른 것을 볼 수 없도록 부유함에 눈이 먼 사람의 혼란스러움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과 모든 이를 조정하려고 하는 이의 마음에서 나오는 혼란입니다. 이것은 모든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겨야 하는 문화에 젖어있는 사람의 혼란스러움입니다.

이런 문화는 무슨 짓을 해도 오직 ‘승자’들을 위한 자리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두려움과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그 두려움은 우리의 안전함이나 생활과 세상에 매여 있는 우리 방식과 진실을 위태롭게 하는 두려움입니다. 이렇게 헤로데는 두려워했고 그 두려움은 범죄를 저지르면서 자기 안전함을 추구하도록 그를 인도합니다. “너는 어린이들의 육신을 죽이고 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너의 마음을 죽였기 때문이다”(성 쿼불트데우스)

우리는 흠숭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람들은 동방에서 왔습니다. 흠숭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임금이 사는 궁전 바로 그곳에 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자신들이 추구하던 것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곳은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궁전에서 임금이 태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바로 자신의 왕궁이고 그 신하들이 있는 곳입니다. 권력, 성공, 행복한 삶의 표징입니다. 그곳은 임금이 존경받고 공경 받으면서 아첨을 받는 곳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받지는 결코 못하는 곳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세속적인 주제들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경배를 드리는 작은 우상들입니다. 권력에 대한 우상, 드러남, 우월함의 경배. 이런 우상들은 슬픔만을 전하고 노예적 두려움에 빠트립니다. 멀리서 온 이 박사들이 해야만 했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는 곳은 바로 거기였습니다. 가장 어렵고 복잡한 대담함이 바로 거기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찾던 것을 발견하는 것은 궁전이 아니라 다른 장소였습니다. 단지 지리적으로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곳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별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을 인도해주던 별을 말입니다. 그 별은 사랑받기를 원하는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별입니다. 이것은 오직 자유의 표징, 폭정이 아닌 자유의 표징 아래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 임금을 발견하는 것은 비천하게 하지 않고 노예상태에 빠트리지 않으며 감옥에 가두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은 다시 일으키고 용서하며 치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 곳, 어쩌면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곳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셨던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곳을 부인하고 있나요.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가운데에는 상처받은 이들, 고생한 사람들, 막 취급되었던 사람들, 버려진 이들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이런 힘과 권한을 일컬어 자비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나요.

헤로데는 흠숭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시선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고 바꿀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경배를 하도록 하는 것을 중단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시작하고 모든 것을 끝맺는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는 흠숭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다른 이들이 그를 흠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조차 흠숭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 많이 알고 있었고 예언들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걸어가기 시작하고 변화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어떤 갈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통상적인 것들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헤로데 추종자들은 습관에 젖어 있었고 그렇게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는 새로움에 대한 약속이 있었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에 대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베들레헴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흠숭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걸어가는 용기가 있었고 작은 분, 가난한 분, 무방비 상태에 계신 분, 베들레헴에 알려지지 않고 계셨던 분, 평범하지 않은 분께 엎드려 경배드리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교종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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