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지하대피소와 도로변에 누워있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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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지하대피소와 도로변에 누워있는 예수"
  • 교종 프란치스코
  • 승인 2016.12.2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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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성탄대축일 밤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12월 24일 저녁 9시30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예수 성탄대축일 밤미사 강론을 통해 성탄의 밤에 태어나 구유에 놓인 아기와 지금도 고통 받고 있는 아이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도전에 대해 강조했다. 

교종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거나, 폭격 때문에 대피소에 있는 아이들과 이민자들로 가득한 배에 누워있는 아기들이 인간의 존엄을 갉아먹는 구유에 있음을 기억하고, 태어나지도 못한 태아들과 굶주림으로 우는 아이들, 장난감 대신 무기를 들어야 하는 아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교종은 성탄은 희망의 신비이며 슬픔의 신비라고 말했다. 그는 거절과 무관심으로 구유에 태어나야만 했던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 요셉이 겪어야 하는 슬픔의 신비인 동시에 두려움을 주지 않는 하느님 빛의 희망의 신비라면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신비에 어느 누구도 소외하지 않고 모두를 초대하고 계신다고 강조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거룩한 오늘 밤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으며 그 선물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집니다. 이렇게 오신 아기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실존입니다. 

영광스러운 밤입니다. 베들레헴 천사들이 선포한 영광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기쁨의 밤입니다. 오늘부터 영원까지 전능하시고 무궁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주의 움직임이나 혹은 신비로운 사상에서 그분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가까이에서 절대 인간을 멀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이 되셨습니다. 

빛의 밤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언급한 이 빛은(이사9.1 참조) 세상의 어둠 속을 걷던 이들에게 빛이 되고, 베들레헴의 목동들에게 나타나 둘레를 비추어 줍니다.(루카 2.9) 목동들은 ‘한 아기가 태어났다’(이사9.5)라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고 이 모든 영광과 기쁨과 빛이 집중되어 있는 곳에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루카 2.12)가 천사들이 알려준 징표임을 알아챕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뵐 수 있도록 해주는 징표입니다. 

단지 그 때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성탄을 지내고 싶다면 이 징표를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여리고 순진한 모습으로 지금 막 태어난 아기가 자애로움의 강포에 싸여 사랑스럽게 누워있습니다. 여기 하느님이 계십니다.
 
이 징표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의 역설을 드러냅니다. 황제나 통치자 혹은 시대의 위인보다 더 높으신 하느님이신데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화려한 궁성에서의 모습 대신 마굿간의 가난함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화려한 외양을 으스대는 대신 삶의 단순한 모습을 취하십니다. 놀랍게도 권력이 아닌 미소함을 택하십니다. 

그 분이 계신 곳으로 가야 그분을 뵐 수 있습니다. 고개를 숙여 자세를 낮추고 왜소해져야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드러나는 겉모습에 속지 말고 본질로 직진하도록 부릅니다. 만족하지도 못하는 요구를 내려놓고, 끝없는 불만족을 버리고, 언제나 부족한 무언가로 슬퍼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버릴 수 있다면 평화와 기쁨과 삶의 의미를 줄 아기 예수님의 단순성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 뿐 아니라 오늘날 요람도 없고 사랑을 줄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이, 폭격을 피하기 위한 지하대피소나 대도시의 도로변, 이민자로 가득한 바지선과 같은 곳에서, 불결하게 ‘존엄을 갉아 먹히는’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들의 도전도 받아들입시다. 태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아기들과 배고픔을 아무도 채워주지 않아 울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장난감 대신 무기를 쥐고 있어야 하는 아이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도전도 받아들입시다.
 
성탄의 신비는 빛과 기쁨, 도전과 불편함입니다. 희망의 신비인 동시에 슬픔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의 맛을 지녀보십시오.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삶은 버려졌습니다. 두드리는 문마다 닫혀 있어서 예수님을 구유에서 낳을 수밖에 없었던 마리아와 요셉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루카 2.7) 

예수님은 몇몇 이들의 거절과 대부분의 무관심 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 대신 우리가 주인공이 되는 축제로서 성탄을 지내게 된다면 같은 무관심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빛을 상점들의 불빛으로 가리울 때나 내몰린 이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선물에만 매몰될 때 말입니다. 

그러나 성탄은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어두움에도 하느님의 빛이 빛납니다. 그분의 빛은 부드럽게 두려움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애로 가난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 중 한 사람처럼,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빵의 집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십니다. 마치 우리를 위한 빵이 되시고자 태어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당신 생명을 주시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당신 사랑을 전해 주시고자 우리의 세상에 오셨습니다. 명령을 내리거나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라 보살피고 헌신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나누는 빵이 되어주신 구유와 십자가가 하나로 이어집니다. 당신이 우리의 생에 빛을 주시고 마음에 평화를 주셔서 우리를 구하시는 사랑의 한 길입니다.
 
이 밤에 소외된 이들이었던 목동들은 이해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기에 그들이 성탄에 초대받았습니다. 자신감에 넘치고 뛰어난 이들은 집에서 자신들의 일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동들은 ‘서둘러 갔습니다.’(루카 2.16 참조) 우리들도 오늘 밤은 예수님을 위하여 도전을 받아들이고, 소외된 감정과 우리의 한계로부터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 갑시다. 구원의 사랑이 다가올 수 있도록 받아들입니다.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곁으로 다가갑시다. 

베들레헴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음을 상상해 봅시다. 빛과 평화, 완벽한 가난과 거부. 목동들과 함께 진정한 성탄을 맞아들여 우리 모습 그대로, 우리의 한계와 치유 받지 못한 상처를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갑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이의 아름다움이라는 진정한 성탄의 정신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내 삶의 빵이 되어주시기 위해 태어나신 예수님과 구유 앞에서 머물러 봅시다. 소박하면서도 끝없는 사랑을 묵상하고 감사드린다고 말합시다. 이 모든 걸 우리를 위해 해 주셨기에 감사드립니다.

교종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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